ADVERTISEMENT

해란강줄기엔 오늘도 한인의 숨결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장원호박사(49·미 미주리대교수·신문학)는 지난 5월26일부터 6월19일까지 중공의 북경·상해및 연변 조선족자치주를 방문했었다. 장박사는 미 미주리대와 중공언론의 언론인 훈련계획에 따라 중공을 방문하는 동안 특히 연변의 한국동포사회를 자세히 둘러보았다. 다음은 장교수가 중공여행 중 연변에 사는 한국동포들의 실제 모습을 직접 보고 쓴 연변 기행문이다.
북경·상해·심양을 거쳐 중공여행을 계속한지 17일째. 6월11일 하오 연변대학이 마련한 강연회를 마치고 저녁식사를 위해 이 대학 교수들과 함께 요정 「요꽃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거리로 나서는데 난데없이 조용필의『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귓전을 때린다.
별로 붐비지 않는 도시에 한국대중가요가 가두 스피커로부터 거리를 꽉 채우다시피 크게 울려 퍼지는 곳.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함경북도가 지척에 있는 중공 연변 조선족자치주 수도 연길시에서 있었던 일이다.
다같이 『선구자』열창
『돌아와요 부산항에』 는 일순간 서울과 만주의 지리적 거리감을 잊게 하는 하나의 「충격」 이었다.
이같은 충격은 요꽃집을 들어서면서도 계속됐다.
거리 이름 표시도 없는 도심의 대노에서 꺾어져 포장 안된 좁은 골목길을 한참 들어가 자리잡은 요꽃집은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면 3평짜리 온돌방 겨우 2개가전부인 요정이었다.
알콜도수 50도의 「낭」 이라는 상표의 배갈과 맥주가 나오는 이집의 안주는 개고기였다. 소내장·불고기등 순 한국식 요리와 함께 개고기 안주가 아무런 거리낌없이 점잖게 나오는 광경은 조용필의 노래 못지않는 충격이었다.
연길시 주변에 한국인 동포가 60만명이나 살고 있다는 한국계 교수들의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파티가 계속되는 동안 한국적인 것은 또 계속됐다.
함께 간 연변대학 조선어조선문학부 최상철교수등 동행한 6명의교수는 이곳 한국 동포들이 「흰술」이라고 부르는 배갈로 거나해지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 귀에 익은 『선구자』를 비롯, 『찔레꽃』 『고향의 놈』 『아리랑』 『양산도』 『도라지타령』등이 메들리로 이어졌다. 나중에는 카세트 테이프로 흘러간 옛 노래가. 더욱 흥을 돋우기 시작했다.
흥이 돋워지자 끝내는 3평밖에 안 되는 좁은 방에서 일행 7명이 모두 일어서서 노래에 맞추어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휴일 서울 교외에 나가면 어김없이 볼 수 있는 한국인의 춤. 누가 여기를 이국땅 중공이라 하겠는가.
이곳으로 오기 전 북경과 상해에서 만났던 중공 언론인들과 교수들은 내가 연길로 간다고 하자 『아, 술 많이 마시고 노래 많이 부르고 춤도 많이 추겠소』 라며 부러워했다.
조용필·김연자 인기
중국인들은 연변을「술과 노래와 춤과 축구」의 고장이라고 부른다.
지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아주 가까운 북한에도 노래와 춤이 없을 수 없겠지만 북한의 가무란 김일성을 찬양하는 군대식 노래와 춤으로 일관해 「술이 즐거운」 연길의 동포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겠다.
그래서 이곳 동포들이 즐겨듣는 것은 북한 상공과 두만강을 넘어 들려오는 한국의 대중가요다.
동포들은 KBS의 음악프로를 최근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카세트테이프 라디오로 녹음해 이를 수없이 반복해 듣는다.
연길시 동포들은 조용필은 물론 김연자의 노래 카세트 테이프를 갖는 것이 유행처럼 됐다.
연변은 또 축구의 고장이다.
6월11일 연변대학의 외국손님 접대용 숙소에서 한국어 TV뉴스를 보게 됐다.
15분간 계속된 연길TV의 저녁 9시 뉴스 끝에 『내일 (12일)하오4시30분에 멕시코에서 열리는 월드컵대회의 한국 대 이탈리아대전을 꼭 시청하시라』 는 안내가 있었다.
연길TV의 이 같은 안내방송은 대전자가 한국팀이어서인지 아닌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그러나 이곳사람들이 축구를 좋아하는 것은 틀림없었다.
60%이상 한국동포
요꽃집에서의 흥겨운 파티는 밤늦게 끝이 났다.
「요꽃집 아주머니」로 통하는 이요정의 주인여자는 50대로 함경도에서 건너왔다고 했다. 통제경제 속의 중공에 요정이 웬말이냐고 의심이 날지 모르나 이 집은 분명 요정이다. 「요꽃집 아주머니」는 이 술집을 독자적으로 경영하는 자본주의식 주인이었다.
파티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같이 갔던 최교수가 『파티 비용으로 1백유엔 (원· 한국돈으로 3만원)이 들었다』고 말했다. 물론 최교수의 개인 돈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최교수의 한달 봉급이1백원 정도에 불과하니까 우리가 먹고 마신 돈은 무려 그의 한달 봉급의 전부가 날아간 것이 된다.
연변의 소비문화는 그래서 만만치 않아 보였다.
이같은 요정은 어떤 면에서 연변의 또 다른 대중문화의 한 요소가 되고 있을지 모른다. 즉 자본주의식 소비문화다.
연길시에는 한국동포가 10만명이 넘어 인구 18만명 가운데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중국본토 전역에 1백80만명의 한국인이 대부분 동북 3주, 즉 흑룡강성 (40만명)·길림성 (80만명)·요령성(30만명)에 몰려 살고 있다고 했다. 또 내몽고쪽에도 10만명이 살고 있다고 했다.
이들 각 지방출신 동포들은 아직도 1930년대 이전의 우리 고유한 풍습과 문화를 거의 원형대로 지키며 살고 있다.
길림성 내의 연변자치주는 1952년 자치주로 승격됐다. 자치주에는 연길·도문 등 2개시와 연길·돈화·화룡·혼춘·왕청·안도 등 6개 현이 있으며 이들 현아래 모두 17개의 진이 있다.
1900년도초 일본의 만주침략거점이 됐던 용정진은 해난강의 하류에 자리잡고 있는 연길현 소재지로 우리가 즐겨 부르는 『선구자』노래의 무대이기도 하다.
연변이 우리 민족사에서 잊을 수 없는 한 장을 갖고 있는 것은 일제침략시 가장 활발했던 한국인의 항일전쟁터라는 점이다.
1920년10월 일본 토벌군 9백명을 몰사시킨 청산리 전투는 두고두고 기억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청산리가 연변에 있다.
이튿날 아침 연변대학등을 둘러본 뒤 하오에는 시장구경을 나섰다.
수많은 사람과 자전거가 길을 메운 시장거리는 60년대 서울·남대문시장처럼 왁자지껄하게 북적거렸다.
길이 5백여m의 이 시장은 양쪽으로 2층 건물이 줄지어 있으나 길에는 땅바닥에 채소 등 농산물을 놓고 파는 노점상이 즐비했다. 어림짐작에 가게가 1천개는 돼 보였다.
이색적인 것은 개고기를 다른 돼지고기나 쇠고기처럼 똑같은 식용고기로 대접, 가게에서 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배급 없어진지 오래
시장 2층은 주로 공산품 가게들로 갖가지 기성복·양복지·비단 등이 있었으며, 특히 나일론 계통의 옷감이 대종을 이루었다.
이 시장의 점포들 가운데 절반이상은 한국동포의「소유」다.
그리고 요꽃집 아주머니처럼 이 점포에서 생기는 수익도 주인의 소유다.
한 노점상 아주머니와 얘기를 나누었다.
『이 채소를 어디서 사온 것입니까』『딥 (짐) 에서 공닥 (공작=일)해 수확한 것이디요』평안도 사투리 억양이 거세게 들린 이 주인아주머니는 자가생산한 물건이라고 말했다.
『하루에 얼마나 파십니까. 』
『달(잘) 팔면 20∼30원은 되디요. 』
이곳 연길의 동포사회는 저축에도 강한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전에는 농산물이든 공산물이든 생산된 것은 모두 국가에 납입하고 식품을 배급받는 형식이었지만 요즘은 농산물의 경우 소출의 월정량을 정부에 갖다바치면 나머지는 얼마든지 개인이 쓰거나 시장에 들고 나가서 팔아 현금을 마련할 수 있다.
이곳 가게주인들은 이미 「부자」라고 이곳 한국동포들은 부르고 있다. <20·21면에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