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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석의 내 마음속 몬스터] 아이를 바꿀 수 있다는 건 착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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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석의 ‘내 마음속 몬스터’를 시작합니다. 분노, 질투, 외로움, 조바심 … . 나를 스스로 괴롭히며 상처를 주는 내 마음속 몬스터들입니다. ‘서천석의 내 마음속 몬스터’를 통해 내 안의 몬스터를 발견하고 이해하며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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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앉아있던 정원씨는 고개를 숙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내쉰다. 몇 번이나 깊은 숨을 쉬어 보지만 답답한 마음은 풀리지 않는다. 도대체 저 녀석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있는 걸까? 오늘도 쭈뼛거리기만 할 뿐 자기 생각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 앞에서 정원씨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답답했다. 하지만 이런 답답함이 하루 이틀 된 것은 아니다.

못마땅한 아이 고치려 노력하다보면
가장 행복할 시간이 좌절·원망으로 누더기
아이가 자기의 삶 만들어가도록 기다려야

아이는 어릴 때부터 작은 일에도 겁이 많았다. 새로운 것을 시킬 때마다 늘 뒤로 물러났다. 익숙해지면 제법 잘 하면서도 처음에는 일단 피하고 자신 없어 했다. 어떻게 하면 자신감을 심어줄까? 정원씨는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우선 운동을 시켰다. 아무래도 몸을 쓰는데 자신감이 생기면 심리적으로도 나아질 거야. 자신감을 키워주는 동화책을 사서 함께 읽고 성공한 사람들의 전기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이는 여전했다.

속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자신감은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적극적인 면이 없고 어떤 일이든 닥치면 우선 걱정부터 했다. 이런 아이가 답답해 소리를 지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네가 뭐가 부족해서 그래. 내가 널 어떻게 낳고 키우고 있는데. 안 된다고 생각하면 더 안 되는 거야. 일단 한 번 해봐.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면 정말 아무 것도 못하는 거야. 이젠 아이도 이런 말에 인이 박혔을 것이다. 벌써 수십 번을 들었을 테니까.

누군가는 한발 물러서서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라고 했다. 그런데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 한발 물러선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좋게 말해 ‘기다림’이지, 사실상 방치가 아닌가? 뭐라도 해서 아이를 바꿔줘야 제대로 된 부모지, 아이가 사는 모습 그대로 괜찮다고 놔두면 아이가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 시간은 가고 아이는 점점 커 가는데 이대로 놔둘 수는 없어. 정원 씨의 기다림은 오래 가지 못했다.

육아서적도 보고 강의도 들었다. 책을 보고 강의를 들을 때면 뭔가 길이 보이는 듯하다. 하지만 막상 내 아이에게 실천해 보면 변화는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책과 강의에 나오는 사례들은 그토록 극적인데 우리 아이는 왜 그럴까? 하지만 마음을 다잡는다. 실망할 때는 아냐. 분명 어딘가 답이 있을 거야. 내가 못 찾은 거야. 좋은 해결책만 찾으면 아이를 변화시킬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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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스트』 이스라엘 만화가 아사프 하누카의 작품. 집값 대출부터 자녀교육까지 어느 것 하나 뜻대로 풀리지 않는 40대 가장의 삶을 실감나게 다뤘다. 미메시스. 1만3800원.

답이 없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문제가 있다면 답도 있어야 한다. 답이 없다면 미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면 이 안에서 죽을 것이다. 반면 노력은 신성한 것이다. 그리고 노력하면 답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이 나쁘진 않다. 노력이란 좋은 것이다. 다만 노력하면 내가 원하는 결과가 반드시, 바로 나타날 것이라 믿으면 어리석을 뿐이다.

노력의 가치는 그 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다는 데 있다. 하버드대 심리학과의 대니얼 길버트 교수는 인간은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목표를 향해 자신을 잘 이끌어가고 있다고 느낄 때 행복하다고 하였다. 목표가 없다면, 한없이 흔들린다면, 자신을 조절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인간은 행복하기 어렵다. 노력이란 목표를 향해 나를 조절해 가는 것이고 이것이 잘 되어갈 때 우리는 행복하다.

하지만 목표가 이루기 어려운 것이라면 우리는 오래지 않아 조절력을 잃는다. 대단한 의지를 갖고 있다면 조금 더 버틸 수 있다. 하지만 겨우 조금 더 버틸 뿐이다. 내가 잘 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다면, 이 길이 맞는지 가끔 이정표가 확인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그 길을 계속 걷기 어렵다. 흔들리고 방황하고 좌절한다.

적잖은 사람들이 자기의 노력 부족을 탓한다. 아주 쉬운 방법이다. 노력은 어지간해서는 끝이 없고 그 극한을 해내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노력은 부족할 수밖에 없기에 어떤 실패도 노력 부족이라는 이유를 대면 그럴 듯하다. 게다가 노력은 미덕이 아닌가? 앞으로 더 노력하겠다는 말을 나쁘게 볼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래서야 늘 같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실패하고, 더 노력하기로 결심하고, 이내 흔들리고, 또 실패한다. 그러고는 또 더 노력하리라 결심한다. 목표가 적절했는지 살피기보다 노력에만 책임을 물으며 실패를 반복한다.

이러한 노력의 문제는 아이를 키울 때 더 분명해진다. 무엇보다 아이를 키울 때는 부모만 노력을 해서는 목표를 이룰 수 없다. 부모가 노력하면 아이는 더 노력해야 한다. 자동차의 액셀레이터를 밟는 것도 노력이지만 차가 앞으로 나가려면 결국 엔진이 돌아가야 한다. 아이가 내 노력을 따라 움직여야 뭐라도 변화가 이뤄진다.

하지만 진실은 부모가 노력한다고 아이가 꼭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신이 아이를 대단히 바꿀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 착각을 버려야 하는데 쉽지 않다. 내가 뭔가 행동을 취하면 아이가 달라질 것 같다. 다만 정확한 방법을 몰라서 아이를 못 바꾼다고 생각하고, 내 노력이 부족해서, 또는 아이의 협조가 부족해서라고 생각한다. 그게 아닌데 다들 그렇게 생각하며 속상해 한다.

정원씨도 마찬가지다. 당장 아이를 바꿀 어떤 방법이 있으리라 믿는다. 그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때로는 아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크나큰 좌절이고 생각만 해도 두렵다. 그래서 아이를 밀어붙이고, 아이의 유년기는 엄마가 하는 노력의 재료가 되고 만다. 아이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이 그저 노력과 좌절, 상대에 대한 원망으로 누더기가 되고 있다.

부모는 분명 아이에게 큰 영향을 준다. 하지만 자판기에 돈을 넣으면 물건이 나오는 것처럼 딱 떨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것은 바꿀 수 없고, 어떤 것은 변화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특정한 개입으로 쉽게 바뀌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더 많다. 당연한 일이다. 아이는 부모가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가도록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자신의 모습대로 살아가면서 자기만의 삶을 만들어갈 주체다. 아이는 부모가 만들 작품의 재료가 아니라 스스로 작품을 만들어가는 작가다. 부모의 노력은 작가의 작업을 도울 뿐 대신할 수 없다.

물론 아이가 만들어가는 작품이 부모의 눈에는 별 볼 일 없을지 모른다. 그렇게 부모가 자꾸 바라보면 아이도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인생이란 작품의 가치는 남이 함부로 매길 수는 없다. 좋은 작품은 다양하고, 그 다양성은 적어도 부모의 편견이나 상상력보다는 넓다. 그리고 정원 씨가 정말 해야 할 질문은 따로 있다. 내 인생이란 작품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서천석은

1969년생. ‘아이와 부모의 마음을 잘 다독여주는 의사’로 유명하다. 서울대 의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마음의 병의 뿌리는 어린 시절에 있다’는 걸 깨닫고 소아청소년정신과 의사가 됐다. 『그림책으로 읽는 아이들 마음』 『우리 아이 괜찮아요』 등 육아 분야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서울신경정신과 원장이자 행복한아이연구소 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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