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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송강호에게도 밀리지 않는 자신만의 존재감으로 ‘밀정’ 엄태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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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689만 명(9월 26일 기준)을 동원한 ‘밀정’(9월 7일 개봉, 김지운 감독). 이 영화의 수혜자를 꼽는다면, 바로 엄태구(33) 아닐까. 그는 ‘밀정’을 통해 대중의 눈도장을 제대로 찍었다. 극 중에서 송강호와 팽팽하게 대립할 때도 결코 밀리지 않는 데다, 광기와 살기로 번뜩이는 그 얼굴은 쉽사리 잊히지 않을 테니. 어둡고 차가운 시대가 만든 괴물 하시모토를 유연하게 연기한 엄태구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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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정`의 엄태구 [사진 전소윤(STUDIO 706)]

-‘밀정’을 통해 ‘배우 엄태구를 다시 봤다’는 평이 많더라.
“좋은 평을 보면 아직도 얼떨떨하다. ‘하시모토를 연기한 배우가 누군지 궁금해 검색했다’는 글부터 ‘외모가 일본 경찰 역에 딱 어울린다’는 말까지 모든 반응이 신기하고 재미있다.”

-‘악마를 보았다’(2010, 김지운 감독)에서 ‘형사4’ 역을 맡았다. 이번엔 비중 있는 역할로 김지운 감독 영화에 다시 출연했는데.
“‘밀정’ 오디션 날은 긴장감 때문에 딸꾹질이 멈추지 않았다. 다행히 김 감독님 앞에서는 딸꾹질이 멈췄는데, 그 순간은 정말 떨었던 기억밖에 없다. 그날 하시모토뿐 아니라 하시모토의 오른팔인 하일수(허성태), 의열단원 등 많은 역할을 연기했다. 물론 가장 탐났던 캐릭터는 하시모토였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하시모토 역을 맡게 됐다. 캐스팅 소식을 듣고 기분이 어땠나.
“‘와!’ 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그런 감정은 딱 5초 정도 가더라. 잠깐 좋다가 갑자기 무섭고, 두렵고, 부담되기 시작했다. 그 기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밀정’ 시나리오에 따르면, 하시모토는 일본으로 귀화한 조선인이다. 경무국장 히가시(츠루미 신고)의 지시로 작전에 함께 투입된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 이정출(송강호)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옥죄며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이정출을 견제하기 위해 별도로 자신의 밀정(密偵)까지 두고, 히가시에게 인정받으려 아부하는 모습에선 콤플렉스 덩어리의 피해 의식마저 느껴진다.

-‘하시모토’라는 인물이 ‘매’ 같다고 느꼈다면서.
“유유히 하늘을 날아다니다 먹잇감 발견 후 낙하하는 매 사진을 보았다. 그 모습에서 하시모토가 떠올랐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의열단과 이정출을) 관찰하다가 어느 순간 확 낚아채지 않나. 동물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처럼 보이도록 연기했다.”

-일본인 경찰이 되어 살아가는 조선인 캐릭터에 어떤 식으로 접근했나.
“‘하시모토는 왜 의열단 잡는 일에 모든 것을 걸까?’ 이 점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편집된 장면 중엔 히가시가 그에게 ‘네게도 조선인의 피가 흐르고 있군’이라 말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자 하시모토는 ‘어려서 일본으로 귀화해 조선에 대한 기억이 없고, 아버지의 얼굴도 알지 못합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대사를 떠올리며 그의 전사(前事)를 상상했다. 내게 ‘밀정’에 출연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하시모토에겐 의열단 잡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앞길을 막는 장애물이 나타나면 치워 버리려는 것이다. 그를 상처 있는 인물로 만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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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정`의 엄태구 [사진 전소윤(STUDIO 706)]

-일본어 대사가 많은데.
“편집된 부분이 거의 일본어 대사 장면이었다. 완성된 영화에는 얼마 나오지 않지만, 실제로는 두 배쯤 더 많이 일본어로 연기해야 했다. 그런데 정말 대사가 외워지지 않더라. 외우는 게 어렵다 보니 트라우마가 도졌다. 언젠가 한번은 일본어 선생님에게 ‘이 대사, 진짜 외워지긴 하는 거냐’고 묻기도 했다.”


-일본어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나.

“상업영화 데뷔작 ‘기담’(2007, 정식·정범식 감독)에서 ‘일본군1 ’역을 맡았다. 대사가 한마디 있었는데 계속 NG를 냈다. 당시 연출부였던 형(엄태화 감독)의 표정이 심상치 않더니, 결국 참지 못한 정 감독님이 ‘점심 먹고 나서 하자’고 말하셨다(웃음). 나중에 영화를 보니 내 목소리 대신 일본어 선생님 목소리가 후시 녹음돼 있더라. 다행히 ‘밀정’에서 일본어에 대한 트라우마를 거의 극복했다.”

-‘밀정’을 본 후 엄태화 감독이 뭐라고 하던가.
“형은 ‘밀정’ VIP 시사회에 왔었다. 이 영화를 정말 좋게 봤다. 특히 송강호 선배님 연기에 대해 엄청 감탄했다. 내게는 딱 한마디 해 줬다. ‘수고했다’고. 우리 형제는 서로를 칭찬해 주는 스타일이 아니다(웃음).”

-허스키한 목소리에 대해 호불호가 나뉜다.‘하시모토 역에 잘 어울린다’는 평가도 있지만 ‘대사가 정확하게 들리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워낙 목소리 톤이 낮아서 대사가 잘 안 들린다고 하니 걱정된다. 예전에는 발성 연습을 많이 했는데, 목을 자꾸 쓰면 상태가 더 안 좋아지더라. 지금은 발음에 더 신경 써서 연기하려 노력 중이다.”

의열단을 쫓는 이정출과 하시모토는, 매번 일촉즉발의 대립각을 세운다. 하시모토는 이정출에 비해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많지 않다. 하지만 그는 이정출과의 기(氣) 싸움에서 밀리지 않는다. 그것은 다시 말해, 엄태구 또한 대선배 송강호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존재감을 드러냈다는 의미다. 배우로서 그의 입지가 “‘밀정’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극 중에서 송강호와 맞서면서도 전혀 밀리지 않더라.
“하시모토가 이정출과의 대립에서 밀리지 않는다고 느꼈다면, 그건 모두 송강호 선배님 덕분이다. 까마득한 후배가 그렇게 연기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셨으니까. 촬영 현장에서 긴장하지 않게 웃겨 주시고, 무엇이든 하나라도 더 챙겨 주시고, ‘잘했다’는 격려도 많이 해 주셨다. 무엇보다 내가 어떻게 연기하든 다 받아 주셨다. 자유롭게 연기하도록 도와주신 거지. 함께 촬영하면서 더 대단하다고 느꼈다.”

-존경하는 선배의 연기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소감은.
“신기했다. 클로즈업하는 것만으로도 그 인물의 이야기가 펼쳐졌으니까. 뭔가를 특별히 하지 않아도 진심이 느껴졌다. 그 진심이 앞에서 연기하던 나도, 이 영화를 보는 관객도 전부 동화시킨다. 이정출의 작은 움직임에도 관객들이 웃지 않나. 전혀 코믹한 상황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건 배우와 인물이 함께 살아 있기 때문이다. 하시모토의 눈으로 이정출을 바라봐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 경외하듯 송강호 선배님을 쳐다보게 되어 당황한 적도 많다(웃음).”

-‘밀정’ 출연으로 연기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을 것 같은데. “송강호 선배님을 만나기 전과 후가 다르다고 할까. 예전엔 연기하는 게 고통스러웠다면, 지금은 행복하고 재미있다. ‘밀정’을 통해 느낀 모든 것들이 배우 생활에 큰 밑거름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싶다.”

-차기작은. “얼마 전에 조용익 감독의 단편영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찍었다. ‘차이나타운’(2015, 한준희 감독)에서 호흡을 맞춘 이수경이 상대 배우였고, 귀여운 멜로영화라 즐겁게 촬영했다. ‘가려진 시간’(11월 개봉 예정, 엄태화 감독)과 ‘택시운전사’(하반기 개봉 예정, 장훈 감독)에도 짧게 등장한다.”

 이지영 기자 lee.jiyoung2@joongang.co.kr 사진=전소윤(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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