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시대의 소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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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반은 우리의 전후경제 복구를 전적으로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던 시절이었다. 1954년11월17일에 변영태외무장관과 「브리크스」주한미국대사 사이에 서명된 한미협약은 한국의 정치·경제·군사문제에 관해 양국 정부가 긴밀히 협조할 것을 약속했고,특히 한국의 경제발전에 최대한 공헌하기 위해 미국이 원조계획을 효과적으로 수행키로 한 것이다.
동란의 근·원인은 따질 겨를도 없이 이 「시혜」 의 은덕이라고나 할까, 아뭏든 그때 전쟁의 페허 속에서 쓸만한 벽돌이나마 다시 써볼까 해서 폭격으로 박살난 건물의 잔해를 뒤지고 다닐때 물들인 미군 작업복을 걸치고 미국의 잉여농산물 밀가루 수제비로 허기를 달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분수에 어울리지 않게 미제 껌을 짝짝거리며 서부활극을 구경하고, 인디언의 참패에 철없이 환호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경제원조 덕분이었다.
그무렵 20대의 청춘을 살았던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것 중 양담배에 대한 추억을 빼놓을 수 없다. 「카멜」「러키 스트라이크」는 레이션 박스에서 알았고, 「팔말」「바이스로이 는 구멍가게에까지 즐비했다. 그때 첫 담배를 배웠던 청년들은 우선 순한 양담배를 몇 모금 빨고 기침이 나오면 냉수를마셨다. 도시로 유학하던 시골 출신 대학생들은 「향토장학금」 이 바닥날 형편이 되면 양담배를 노점상에서 개비로 사 피웠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라는 속담대로라면 20살 버릇은 죽는 날까지 쯤으로 어림잡아야 할까. 오늘날 일부 국민의 지극한 양담배 선호증은 이런 뿌리에서 비롯된 듯 하다. 통계숫자를 가진 것은 아니나 세상에서 우리처럼 양담배 좋아하는 국민도 없을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오죽했으면 명예의 손상이나 벌금을 마다않고 굳이 이것을 피웠겠는가.
양담배를 피우다 단속반원에게 걸려 벌금 물고 망신당하는 사레는 비일비재하고, 심지어는 이 때문에 목이 달아난 고위공직자도 한 둘이 아니다. 어디서 그 많은 양담배가 쏟아져 나오는지도 불가사의였지만 위험을 무릅쓰고서도 피우는 사람의 심사 또한 그만큼이나 이해가 안가는 것이었다.
이렇듯 파란과 곡절이 얽힌 양담배가 다음달부터 시판되고, 내놓고 피워도 되게 됐으니 세상이 달라졌다는 기분이 드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그 러나 좋아할 일만은 아니라는 것은 조금만 지각이 있는 사람이면 다 알 일이다.
국가간에 장사거래를 하는데 내물건만 팔고 네 물건은 안사겠다는 태도는 억지임이 분명하다.그러나 그 품목의 종류나 수량의 선정은 그나라의 국내 사정을 고려하여 국제간의 형평을 유지하는 것이 상식이요,관례다. 미국은 이제 겨우 개인별 평균 GNP가 2천달러를 넘어서긴 했으나 5백억달러에 육박하는 외국빚을 지고 있으며 막대한 무역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를 위압적 자세로 몰아 붙여 자기네 경제정책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있다.
섬유·신발·전자제품등 우리 상품 수입에는 각종 규제를 가하면서도 농산물을 비롯한 상품시장과 보험·굼융·서비스시장, 물질특허와 저작권등 이른바 지적소유권까지 개방을 강요한다. 양담배도 그 중 하나다.
양담배 수입개방 압력에는 또 다른 의도가 숨어있다. 일종의 공해수출이란 점이다. 미국에서 담배는 유해물질로 단정하고 흡연을 범죄시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유럽에서도 같은 경향이어서 수요가 급격히 줄어 들자 개도국에 대한 수출에서 활로를 찾으려는 의도로 담배 수입 압력을 강하게 가해온 것이다. 내몸에 해로운 물건을 남에게 팔아 돈을 벌겠다는 악덕 불량식품 업자의 심보와 다를게 없다.
「팔말」 과 「바이스로이」에 대한 소시적 입맛에 향수를 느낀다 할지라도 이런 껄끄러운 연유로 수입된 양담배를 입에 물고서 마음이 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배알이나 쓸개가 없는 사람이면 몰라도….
담배란 코 끝을 스쳐가는 향기에는 약간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그연기 속에 들어있는 니고틴이나 타르 같은 유해물질의 함량은 마찬가지다. 어디 담배뿐이겠는가. 외제라 해서 품질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선진국 상표가 붙어 있다고 모두 선진국 상품도 아니다. 한 때는 우리가 물건을 살 때 『국산이냐, 외제냐』를 따졌던 적도 있었으나 이제 자칫하면 외국에 나가서 국산품을 사오기 쉬울 정도로 국산품의 품질이 향상됐다.
오히려 국산품이 우수하다는 공공기관의 시험결과도 나오고 있다. 반면 수입상품 중에는 불법·불량상품이 많다는 소비자 고발이 있는가 하면 수출품이기 때문에 자기들은 사용하지 않는 첨가물을 넣은 선진국 불량식품도 적발되고 있다. 외제 좋아하다가 비싼 돈만 버리는 게 아니라 몸 상하고 외화까지 낭비하는 3중의 우를 범할 수도 있는 일이다.
기술과 품질면에서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품목까지도 국산품만 애용하자는 것은 강변에 불과하다. 그것은 제조업자가 책임질 일이다. 수입규제의 방호벽 속에서 온존하던 시대는 지났다. 경쟁력을 갖도록 하는 것은 개방정책의 장점이기도 하다. 다만 양담배를 피워 물고 기분이 우쭐해지는 정신자세 따위로는 이 개방무역시대를 이겨낼 수 없다는 얘기다.
이제 수입개방의 물결을 타고 외제상품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행정력이나 제도는 그 물결을 막아낼 힘을 상실하고 문을 활짝 열어버렸다. 대신 소비자인 국민이 단합된 의지로 그 힘을 발휘할 단계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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