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도그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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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그빌(원제 Dogville)'은 올해 세계 영화계가 거둔 수확을 얘기할 때 그 첫머리에 놓여야 할 작품이다. 그만큼 혁신적이고 대담하고 충격적이다.

'유로파''킹덤''브레이킹 더 웨이브''어둠 속의 댄서'…, 매번 예기치 못한 작품으로 빈혈 증세를 보이는 현대 영화에 적혈구를 주사(注射)해 온 덴마크의 라스 폰 트리에(47) 감독은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도그빌'은 무엇보다 형식면에서 화들짝 놀라게 한다. 영화 만들기의 귀족주의랄까 엘리트주의를 비웃는 것이다. 카메라는 3시간에서 2분 빠지는 긴 상영시간 내내 연극 무대 같은 작은 공간을 단 한 번도 벗어나지 않는다.

도입부에 미국 로키 산맥 기슭의, 여덟 가구가 사는 '도그빌'이라는 마을에서 사건이 일어났다는 내레이션이 나온다. 그러나 곧 이어 보이는 화면은 숲이 울창한 시골이 아니다.

실내 체육관 같은 공간 한편에, 하얀 색 페인트로 칸을 질러 '여기는 톰의 집, 저기는 진저네 집, 이 곳은 숲으로 통하는 길'식으로 적혀 있을 뿐이다. 애들 소꿉장난하듯이 말이다.

문이나 벽도 아예 없다. 그런데도 등장인물들은 천연덕스럽게 문의 손잡이를 돌리는 시늉을 하고 스피커에선 삐걱거리는 사운드 효과로 조응한다. 번듯한 세트 하나 없이 바닥에 금 몇 개 그어 놓고 한 편의 영화를 찍어 내다니, 놀랍지 않은가!

감독은 마치 "영화라는 게 꼭 모든 것을 보여주어야 하나. 관객과의 상상력 게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물론 이 게임은 대성공했다.

또 하나 시종 '들고 찍기(핸드 헬드)'로 촬영했다는 점이다. 이 방식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화면으로 영화에 역동감을 더해 주었다. 트리에 감독은 1995년 '도그마95'라는 걸 발표했다.

영화는 원하는 누구나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영화의 민주화' 요구였다. '모든 영화를 핸드 헬드로 찍으라'는 것은 도그마 선언의 항목 중 하나였다. '도그마95'에 대해 일부에서 이상론이라며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는 줄곧 그 정신에 충실하려 해왔고 '도그빌'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제목이 '개(같은)마을'이라는 뉘앙스를 띠는 데서 알 수 있듯 영화는 인간의 숨겨진 포악성에 초점을 맞춘다. 갱들의 추적을 피해 마을로 숨어든 그레이스(니콜 키드먼). 낯선 여인에 대한 경계심과 갱단의 보복이 두려운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받아들이기를 주저하고 결국 2주간 지켜본 후 결정하기로 한다.

천사 같은 그레이스는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마침내 그들의 일원이 된다. 그러나 경찰이 들이닥쳐 그레이스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현상금이 붙은 포스터가 나붙자 마을 사람들의 태도도 돌변한다. 그녀는 이제 천사가 아니라 '창녀'로 취급된다.

로렌 바콜 등 관록과 노련미를 갖춘 배우들이 영화에 무게를 실었지만 '도그빌'은 특히 니콜 키드먼에게 크게 빚지고 있다. 수난 받는 여성으로서의 잔 다르크 같은 표정에서, 복수의 욕정에 싸인 악마적인 모습까지 낙차 큰 연기를 매혹적으로 소화했다. 확실히 그는 지금 연기의 절정기를 누리고 있다.

'브레이킹 더 웨이브''어둠 속의 댄서'에서 현실의 고난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순교자로서의 여성상을 그렸던 감독은 '도그빌'에서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으면서 보다 냉철해졌다.

그 결과 우리의 본성이 해부학적으로 드러나 고개를 돌리고 싶기도 하지만, 진실이 주는 어쩔 수 없는 감동은 이 영화를 외면하기 힘들게 만든다. 18세이상 관람 가. 다음달 1일 개봉.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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