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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트] 애플·구글·아마존·페북…돈·기업 빨아들이는 세계시장 무법자 될 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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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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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은 루저들(losers)이나 하는 것이다. 경쟁하지 말고 독점하라.”전자결제업체 페이팔의 창업자이자 실리콘밸리의 유명 투자자인 피터 틸은 기업들을 향해 역설한다.

이코노미스트 ‘IT 거인’ 폐해 비판
시장 독점으로 막대한 수익 창출
시총 세계 톱 10 기업 중 6개 차지

디지털 혁명의 시대라지만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업가 정신, 경쟁을 통한 성장과 발전이라는 자유시장의 가치는 오히려 퇴색하고 있다. 오랜 금과옥조를 흔들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인류의 삶을 혁명적으로 바꾼 스타 기업들이다. 애플·구글·페이스북 같은 정보기술(IT) 대기업의 거침없는 ‘몸집 불리기’가 전 세계 고객과 수익은 물론 유망한 인력과 기업을 빨아들이고 ‘시장의 룰’마저 좌지우지하는 현상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급기야 기업의 ‘과도한 규모’가 세계 경제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논쟁까지 불거졌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호에서 ‘거인들의 그늘(In the shadow of giants)’이라는 제목으로 거대 기업의 폐해를 강하게 비판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잡지가 2012년엔 “규모가 있어야 전문화되고 혁신도 나온다”며 큰 기업의 장점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4년 만에 “미국 산업·경제가 한 줌의 거인 기업들에 장악돼 소수를 위한 부를 창출하고 있다”는 1910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연설을 인용하며 “거인 기업들의 과도한 몸집 불리기에 준엄한 경고를 내릴 필요가 있다”고 입장을 바꿨다.

실제 오늘날 몇몇 IT 대기업은 루스벨트 시대의 US스틸·스탠더드오일·시어스 등과 맞먹을 정도로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올 9월 21일 기준 세계 시가총액(이하 시총) 상위 10대 기업 중 6곳이 IT 기업이다. 그리고 시총 6120억 달러의 애플을 비롯해 알파벳(구글의 모기업)·마이크로소프트·아마존·페이스북 등 5곳이 미국의 IT 기업이다. 10년 전 세계 시총 1~10위 명단에 미국·영국·러시아·일본·중국 등 다양한 국적·업종의 기업이 올라 있던 것과 확실히 달라진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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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 기업이 점점 커지고 여기에 세계 시장이 의존하는 현상도 뚜렷하다. 글로벌 회계컨설팅 기업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가 지난 3월 말 기준으로 시총 세계 100대 기업을 조사했더니 1000억 달러(약 110조원) 이하인 기업이 2009년에는 73개나 됐지만 2016년엔 33개로 줄었다. 반면 시총이 3000억 달러(약 330조원)가 넘는 기업은 2009년 1개에서 2016년 6개로 늘어났다. 한국의 시총 1위 삼성전자가 약 230조원이니 말 그대로 ‘메가톤급’ 덩치다. 2012년부터 5년 연속 시총 1위에 오른 애플과 100위 기업의 차이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IT 공룡 기업들이 몸집을 키운 수단은 대부분 인수합병(M&A)이다. 일례로 구글은 98년 설립 이래 130개가 넘는 기업을 인수했다. 모바일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 동영상 플랫폼 유튜브, 인공지능(AI) 컴퓨터 ‘알파고’도 모두 구글의 인수 성공 사례다.

문제는 글로벌 IT 기업들이 시장을 독점하는 속도와 영향력이 과거 제조 기업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크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기업은 제품과 서비스 경쟁을 통해 고객을 확보했지만 ‘플랫폼’을 장악한 글로벌 IT 기업들은 별다른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고객이 되는 구조다. 애플의 아이폰을 쓰는 사람들이 OS의 호환성 때문에 또 다른 애플 제품과 서비스를 찾는 현상이 대표적이다. 남들이 많이 쓰는 소셜미디어와 스마트폰에 사람이 몰리는 ‘네트워크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게다가 IT는 사실상 만국 공통이라 별다른 진입장벽 없이 해외 고객을 대거 흡수하고 막대한 수익을 창출한다. 지난 6월 기준 애플의 현금 보유액은 2320억 달러(약 256조원)로 핀란드나 칠레의 국내총생산(GDP)과 맞먹는다. 이들은 풍부한 자금을 실탄 삼아 세계 곳곳의 우수 인력과 유망 기업들을 인수한다. 몸집은 점점 불어나고 지배력도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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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이들이 조세회피처 지역에 법인을 세우고 인건비가 싼 나라에서 비용을 절감하면서 글로벌 대기업의 탈세 이슈가 급부상했다. 애플만 해도 현금 2320억 달러 중 2150억 달러가 미국이 아닌 해외에 있다.

부작용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유명 기업에 인수되는 것’이 스타트업(창업 초기 기업) 성공의 척도가 되면서 기업공개(IPO)가 줄었다. 금융정보업체 딜로직에 따르면 올 들어 상반기까지 미국 증시에 상장한 신생 기업은 55개로 지난해 같은 기간 121개, 2014년 같은 기간 180개보다 크게 줄었다. 스타트업 수는 70년대 이후 가장 낮아 ‘기업(起業) 천국’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정도다.

대기업의 이미지도 나빠졌다. 여론조사기관인 갤럽이 미국인을 상대로 ‘대기업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묻자 ‘아주 많이 믿는다’ 또는 ‘많이 믿는다’고 답한 비율은 75년 34%에서 올해 18%로 거의 반 토막이 났다. 반면 ‘거의 안 믿는다’ 또는 ‘전혀 안 믿는다’는 대답은 75년 25%에서 올해 38%로 늘어났다.

글로벌 대기업에 대한 불신은 규제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유럽연합(EU)이 애플이나 맥도날드 등에 거액의 세금을 부과한 것은 물론 영국 국민이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를 선택하고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지지를 받는 것도 글로벌 기업에 유리한 자유무역과 자유 이민정책에 반대하는 여론이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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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는 정보·네트워크 흐름에 초점을 맞춘 ‘디지털 시대의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플랫폼을 이용해 유망 경쟁자를 몰아내고 다른 사람들의 콘텐트를 자기 것으로 둔갑시키는 IT 기업들의 독점 행위를 막아야 한다는 얘기다.

반면 IT 기업의 거대화를 자연스러운 시장 질서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이병태 KAIST 경영대 교수는 “속도가 생명인 디지털 시대에는 기업이 일일이 연구개발(R&D)을 통해 분야를 확장하기가 어렵다”며 “큰 기업이든 작은 기업이든 생존하려면 마치 벤처캐피털처럼 다른 기업에 투자하고 M&A를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규모가 커지면 IT 기업이라 해도 조직 내 관료주의가 생기고 대기업병이 생겨 IBM같이 왕좌를 내주게 된다”며 “결국 끊임없이 혁신 DNA를 유지해 AI·3D프린팅·자율주행 등 기술 패러다임이 바뀔 때 기회를 잡는 기업이 새로운 승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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