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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갈등이 빚은 복수극 대기업 ‘오너 리스크’ 연상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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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8호 22면

영화 ‘폭풍의 언덕’(2011)의 히스클리프(왼쪽)와 캐서린.

『폭풍의 언덕』 1847년 초판본

소설 『폭풍의 언덕 (Wrthering Heights)』은 영국 작가 에밀리 브론테 (Emily Bronte·1818~1848)가 1847년에 펴낸 작품이다. 요크셔 지방에서 태어나 자란 그녀는 삼십 평생 단 한 권의 소설인 『폭풍의 언덕』을 썼다. 이 소설이 출간된 당시는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기간(1819~1901)으로서 대영제국의 번영기였으며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방식이 엄격하고도 보수적인 경향을 보였던 시대였다.


『폭풍의 언덕』에서 자주 등장하는 증오와 복수, 유혹과 타락, 가족 간의 암투 등의 소재들은 경건한 빅토리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래서 브론테는 자신의 본명을 감추고 ‘엘리스 벨(Ellis Bell)’이라는 필명으로 이 소설을 세상에 내놓았으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 무명작가가 쓴 ‘막장 소설’로 치부돼 묻힐 뻔한 이 소설은 세월이 흘러 시대가 바뀌고 가치관이 변화하면서 영국인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억지 해피엔딩이나 도덕적 설교에 식상해 하던 19세기 독자들은 거칠고 격정적인 인간의 욕망과 애증을 리얼하면서도 유려한 문체로 과감하게 그려낸 『폭풍의 언덕』을 인간의 본질과 한계를 보여 준 명작이라고 호평하면서 영국 문학 최고 걸작 10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1 『폭풍의 언덕』 배경이 된 요크셔 지방 스탠버리의 탑 위든즈 언덕 정상에 있는 집터와 나무.

누더기 걸친 집시 소년 집으로 데려와-요크셔 지방의 황량한 벌판에 위치해 ‘폭풍의 언덕’이라고 불리는 저택의 주인은 언쇼다. 그는 어느 날 리버풀에 갔다가 누더기를 걸친 더러운 몰골의 한 집시 소년을 데려와서 양자로 삼고 ‘히스클리프’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가족은 출신을 알 수 없는 이 소년을 경계했다. 특히 아들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처음부터 미워하고 구박을 했다. 그를 편애하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히스클리프는 그 집에서 자라면서 또래인 캐서린을 좋아하게 된다. 아버지 언쇼가 죽은 후, 아내를 데리고 집에 돌아와 주인이 된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미워해 머슴처럼 가혹하게 학대한다. 히스클리프는 자신이 연모의 정을 느끼고 있었던 이복동생 캐서린마저 이웃 드러시크로스 저택에 사는 린튼 가문의 아들 에드거와 사랑에 빠져 곧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게 되자, 크게 상심해 가출한다.


3년이 지난 후, 부자가 돼서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그가 사랑했던 캐서린이 정신착란 증세로 힘들게 살다가 죽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된다. 캐서린의 무덤에서 피눈물을 흘린 그는 언쇼 가문 사람들을 복수하겠다고 결심한다. 먼저 아내 프랜시스의 죽음 이후 폐인이 된 힌들리를 도박으로 빈털털이로 만들어버린다. 결국 힌들리가 알코올 중독으로 죽자, 그는 힌들리의 아들인 헤어턴에게 자신이 당한 대로 앙갚음을 해, 하인으로 부리면서 학대한다. 언쇼 가문의 주인자리를 차지한 히스클리프의 복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연인 캐서린을 뺏어간 에드거 린튼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여동생 이사벨라를 짐짓 유혹해서 결혼한 뒤, 그녀를 심하게 학대해 불행하게 만든다. 히스클리프의 학대를 견디지 못한 이사벨라는 런던으로 달아나서 그의 아들을 낳는다. 히스클리프는 린튼 가문의 저택을 차지할 목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에드거의 딸 캐서린과 강제로 결혼시킴으로써 마침내 드러시크로스 저택을 자신의 손에 넣는 데 성공한다.


폭풍의 언덕과 드러시크로스 두 저택의 주인이 돼 복수를 완성한 히스클리프의 말년은 행복하지 못했다. 양쪽 가족들이 모두 떠나 텅 빈 저택에서 늙고 병들어 하인 한 사람과 외롭게 살아가던 그는 어느 날 쓰러져 눈도 감지 못한 채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주인을 잃은 ‘폭풍의 언덕’ 저택은 그가 그토록 중오했던 힌들리의 아들 헤어튼 언쇼가 상속하게 된다. 그 이후로 폭풍이 부는 밤이면 이 저택에서 히스클리프와 캐서린 언쇼의 유령이 떠도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2 탑 위든즈 언덕에는 이곳이 『폭풍의 언덕』 저택자리일 것이라고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다.

전 근대적 지배구조에 기인한 경영권 승계 갈등필자는 소설 『폭풍의 언덕』에서 보이는 가족 간 갈등과 위기가 우리나라 일부 재벌 기업들의 모습과 오버랩되고 있음을 본다. 지금 한국의 몇몇 재벌기업들은 바람 잘 날이 없이 고통과 위기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위기는 재무적인 것에 기인하기보다는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가족 간 갈등과 기업의 전 근대적인 지배구조에 기인한 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재벌기업들의 고질적인 ‘오너 리스크’는 우리의 경제를 위태롭게 하고 국민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1998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정부당국은 재벌기업들의 무분별한 투자와 방만한 차입경영에 대한 철퇴를 가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일부 재벌들이 분사되거나 해체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재벌그룹의 족벌경영에 대한 국민의 거부감은 여전하다. 사람들은 이제 재벌기업들의 경영권 승계에 있어서 보다 획기적인 변화를 바라고 있다.


재벌(財閥)이라는 명칭은 원래 일본에서 온 것이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 이래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외국과의 무역을 통해 자본을 축적한 재벌기업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초기에 있어서 재벌의 존재와 족벌경영에 대해서 일반대중의 비난은 거의 없었다. 그 후 1932년 우익 정치단체인 혈맹단이 미츠이(三井)의 반토(番頭·전문경영인)인 단 타쿠마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츠이 은행이 미국 달러를 사재기 해 폭리를 취하면서 서민경제에 피해를 끼쳤다는 이유였다. 이 사건 직후 미츠이뿐만 아니라 다른 재벌들에 대해서도 일본 국민의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됐다. 미츠이 재벌은 사건 직후 족벌경영을 제한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개혁안을 발표하고 가족대표인 당주(當主)를 제외한 모든 미츠이 가족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이 일로 재벌기업 가족의 경영참여가 제한되고 가족이 아닌 전문경영인에 의한 기업운영이 확산하는 계기가 됐다.


전문경영인에 의한 기업운영 확산돼야일본 재벌의 경영권 승계 방식은 한국의 재벌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경영권 승계는 창업자의 후손들이 승계했지만 전문경영인인 반토(番頭)들도 나름 주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능력을 인정받은 일부 반토들은 때로는 당주와 양자결연을 맺어 자식이 되거나, 당주의 자녀와 결혼해 데릴사위가 돼 공식 후계자가 될 수 있었다. 한국의 재벌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순수혈통’ 중심의 승계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일본의 재벌은 ‘순수혈통’뿐 아니라 피가 섞이지 않은 ‘의제(擬制)혈족’에게까지 경영권을 승계하는 등, 개방적이고 능력을 중시하는 승계 전통을 100여 년 전부터 확립했다.


11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적 명품 가전회사인 독일의 밀레(Miele)는 경영권 승계에 있어서 독특한 방식을 고수해 오고 있다. 밀레는 밀레와 친칸이라는 두 가문이 공동 창업한 기업으로서 밀레 가문이 총 주식의 51%를, 친칸 가문이 49%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비상장 가족기업이다. 가족기업이기는 하지만 친족이라고 해서 누구나 후계 경영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밀레는 경영권 승계시 두 가문의 자손 수십 명의 후보들 가운데 경합을 통해 회장을 선발하는데 자격요건이 매우 까다롭다. 우선 후보자는 국내외 명문대학에서 박사학위(공학박사 또는 경영학박사 등)를 취득해야 하며, 4년 이상 밀레가 아닌 타회사에서 관리자로 근무해야 하는 조건이 붙어 있다. 이런 조건을 요구하는 이유는 가족회사에서 근무함으로써 ‘동종교배’를 통한 편협한 사고방식을 갖게 되는 것을 막고, 회사의 진취성과 창의력을 키우기 위함이다. 후계자 심사과정에 외부 전문가의 도움도 받는다. 1차 심사는 헤드헌팅 회사에서 후보자들의 이력과 경험, 자격 등을 엄격히 심사하여 1차 합격자들을 선발한다. 다음 단계로 양 가문에서 3명씩 선정한 6인의 심사위원들이 1차 합격자들에 대해 심층면접을 실시하는데, 가혹하기로 소문난 이 심층면접을 통과한 최종 1인이 마침내 밀레의 회장이 된다,


자기와 주변 파멸시킨 ‘옴므파탈’형 주인공한국의 대기업은 전 근대적인 순혈주의 방식의 경영권 승계를 재검토해야 할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가족과 친인척들을 대거 경영진에 포진시키고 순환출자,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등을 통해 적은 지분만을 소유해 책임은 별로 지지 않으면서 경영의 과실을 독차지하는 폐습을 이제는 끝내야 할 시점이 됐다. 국민은 지금 재벌들에 대해 소유와 경영의 분리와 경영 투명성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오너 리스크’의 진앙지며 우리나라 경제의 발목을 잡는 지뢰라고 할 수 있는 경영권 승계에 있어서도 투명성, 개방성이 확보돼 경영능력을 검증받은 후계자가 경영권을 이어받아 기업의 경쟁력을 키우는 풍토가 정착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주주권리, 특히 소액주주의 보호, 이사회 운영의 합리화, 경영의 투명성, 사회적 책임 등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재벌 기업에 대해 국민이 가지고 있는 우려와 부정적인 시각을 불식시키고 경쟁력을 키우는 경영을 하는 것이 우리의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폭풍의 언덕』 이야기는 우리나라 일부 재벌 대기업들에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왕자들의 난’이 기업경영의 마비와 국가 신인도 하락으로 이어지는 재벌기업의 고질적 병폐를 이제 근본부터 치료해야 할 필요가 있다. 소년시절 자신을 가족구성원으로 받아들여주지 않고 하인으로 부리고 연인과의 이별을 강요하는 등 상처를 준 언쇼 가족에게 광기와 집착으로 잔인한 복수를 한 히스클리프, 그는 복수에는 성공했지만, 자신과 주변 인물들까지 파멸시킨 전형적 ‘옴므파탈’형 인간이었다. 소설 『폭풍의 언덕』에는 우리나라 가족 대기업의 오너들에게 주는 교훈이 담겨있다.


김성국이화여자대학교 경영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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