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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낙하산을 위한 금융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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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국거래소의 새 이사장에 친박 인사가 내정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낙하산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 12일 후보 공모를 마친 거래소 이사장에는 정찬우 전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을 포함해 5~6명의 후보가 응모했다. 금융권에서는 정 전 부위원장이 사실상 새 이사장에 내정된 것으로 보고 있다. 줄곧 연임 의지를 보였던 최경수 현 이사장이 막판에 갑자기 공모에 참여하지 않은 것도 그래서란 것이다. 정 전 부위원장은 박근혜 대통령 대선 캠프 출신이다. 금융위 부위원장 시절엔 금융권 인사를 좌지우지해 ‘청와대 핫라인’으로 불렸다.

거래소 이사장에 금피아 내정설
정권 말 낙하산 공습 신호탄인가
제2, 제3 대우조선 사태 올 수도

사실이라면 참으로 민망하고 참담한 일이다. 거래소는 지난해 공공기관 지정에서 해제됐다. 관료의 재취업을 제한한 현행 공직자윤리법 적용 대상도 아니다. 전직 금융 관료를 낙하산에 내리꽂기에 안성맞춤이다. 산업은행·기업은행장 후보설이 나돌던 정 전 부위원장이 거래소로 방향을 튼 것도 이런 점을 고려했을 것이다. 적임자를 따지는 기준이 능력·자질이 아니라 낙하산이 가능하냐 여부였던 셈이다. 금융투자업계에선 벌써 낙하산 인사로 정권 말 증시 부양 등을 통해 거품만 잔뜩 키우는 것 아니냐며 불안해하고 있다.

거래소는 시작에 불과하다. 이번 주부터 내년 초까지 임기가 끝나는 금융 공기업 최고경영자(CEO) 공모가 줄을 잇는다. 신용보증기금과 예탁결제원, 자산관리공사·IBK기업은행·우리은행, 기술보증기금·수출입은행까지 대폭 물갈이가 예고돼 있다. 이런 자리를 노린 인사들이 정치권 실세나 청와대에 열심히 줄을 대고 있다고 한다. 그 바람에 진작부터 정권 말기에 금융권에 또다시 대규모 낙하산 인사 공습이 이뤄질 것이란 우려가 컸다. 거래소 이사장 내정설은 그런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낙하산 인사는 한국 금융의 고질병이 된 지 오래다. 금융 낙하산의 폐해가 얼마나 지독한지 우리는 지금 대우조선해양과 한진해운 사태를 통해 절절히 체감하고 있다. 수십조원을 퍼붓고도 대우조선은 살길이 막막하다. 한진해운은 수출 한국의 얼굴에 먹칠을 하며 세계 해운 물류대란의 원흉으로 지탄받고 있다. 지난 10여 년간 대주주 또는 주거래은행이던 KDB산업은행에 줄줄이 낙하산 회장들을 꽂아넣어 제대로 관리감독을 못한 업보다. 그 뒷설거지를 하느라 혈세가 투입되고 한국은행의 양적완화까지 동원되는 판이다.

낙하산 인사가 계속되는 한 이런 일은 무한 반복될 것이다. 금융 공기업은 부실기업 구조조정의 핵심 축이다. 낙하산에 점령당한 한국 금융으론 제때 기업 부실을 도려낼 수 없다. 제2, 제3의 대우조선 사태가 이어질 수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낙하산 인사를 뿌리뽑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이 지켜졌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금부터라도 바꿔야 한다. 거래소가 시작이다. 무능한 낙하산 인사를 철저히 걸러내야 한다. 무늬만 공모가 아니라 공정·투명 경쟁을 통해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인물을 뽑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