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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 않은 제헌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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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개헌논의가 각계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제헌절을 맞는다.
돌이켜보면 38년에 이른 우리의 헌정사는 오욕과 파란으로 점철된 수난의 역사였다. 그동안 여덟 차례의 개헌이 4·19, 5·16등과 같은 정변에 의한 개헌을 빼놓고는 모두가 집권군의 집권연장을 위한 수단으로만 이용되어 왔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헌법 개정은 개악으로만 치달은 결과가 되어 만신창이의 우리 헌법은 이제 아홉 번째 수술대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추진되고 있는 개헌작업은 집권자의 자의로 요리되던 종래와는 달리 표면상으로는 모든 이해집단의 참여 속에 진행되고있다는데 특징이 있다. 현 집권자가 집권 연장을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권력이양을 전제로 한 것은 우리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개헌작업의 추이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은 이유도 거기에 있다.
여야는 험난한 협의과정을 거쳐 국회 헌특이란 본격적인 협상무대를 마련하는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과연 합의개헌이 이루어질지 현재의 상황은 불투명하기만 하다.
야당이 오래 전에 대통령직선제를 당론으로 굳힌 반면 여당은 이를 반대, 내각책임제 선호경향으로 기운가운데 어느 쪽도 물러설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합의개헌 말고는 파국을 막을 다른 선택은 없다는 인식에 여야는 일치한 듯 보이지만 타협의 전망에 대해서는 누구도 뚜렷한 해답을 못하고 있다.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법은 고쳐야 한다. 국가의 최고 규범인 헌법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나라가 처한 제반 여건에 비추어 잦은 개헌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헌법이 개정될 때마다 빚어지는 엄청난 국력낭비나 국론분열은 차치하고라도 헌정 38년에 그리고 다른 모든 분야에서 선진국에의 도약을 기약하는 마당에 국민적 합의를 담은 헌법하나 제대로 갖지 못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정권의 향방과 직결되는 권력형태도 중요하고 국민의 기본권조항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헌법이 명기한 조항이나 헌법정신을 지키고 이행한다는 자세다. 헌법이 아무리 잘 만들어지고 잘 다듬어졌다해도 충실하게 그것을 준수하겠다는 의지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동안의 헌정위기나 악순환이 반드시 헌법이 잘못되어 빚어진 현상은 아니다.
헌법에 명확한 조항이 있는데도 하위법이 정반대로 뒤집어 이를 휴지화한 경우마저 얼마든지 있다.
위정자들 자신이 헌법을 다반사로 짓밟는 풍토 속에서 정치에 대한 믿음이 싹틀 수 없음은 자명한 이치다.
뿐더러 권력은 수단을 불문, 잡으면 되고 한번 잠은 권력은 절대로 놓치지 않으러 드는 후진적인 정치문화 속에서 민주주의의 꽃이 피어날 수는 없는 일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번의 개헌은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간절한 바람을 충실히 담는 내용이어야 한다. 아무리 입으로 민주화를 외치고 미사여구를 나열해 보았자 이를 실천할 의지가 없거나 부족하다면 국민의 승복을 받아낼 길은 없다.
국민의 동의나 여망을 반영하지 못한 헌법이 정치적·사회적 불안을 배태시키는 원인이었음은 과거의 헌정사가 너무도 극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그동안 이룩한 경제발전과 우리국민의 높은 의식수준에 비추어 우리도 이제 어느 나라 부럽지 않은 민주적인 헌정제도를 정착시킬 때도 되었다. 그것이야말로 서른 여덟 번째 제헌절을 맞아 정치인과 국민 모두의 다짐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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