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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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백범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속에 「내가 원하는 우리 나라」를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되기를 원한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남을 침략하는 것은 원치 아니한다.…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힘은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그 백범이 일제에 빼앗긴 강토를 무력으로 되찾기 위해 광복군을 창설한 것은 1940년 9월17일 중국 중경의 가능강 기슭 가릉호텔에서였다.
임시정부 주석인 백범이 창설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총 사령에 이청천 장군, 참모장에 이범석 장군이었다.
광복군은 이날 임정 포고문을 통해 국내외 동포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한편 1907년 8월1일 일제가 한국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던 그 날이 바로 「광복군의 창설일」임을 선언했다. 광복군이 구한국군의 후신으로 33년간에 걸친 의병과 독립군의 항일투쟁을 계승한 정통무장 항일단체임을 강조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항일 투쟁사는 실로 반세기를 훨씬 넘는다.
한말에 일제가 우리의 국권을 침탈하려 하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고일어난 의병의 봉기가 20년에 걸쳤고, 1910년 나라를 잃자 만주를 무대로 한 독립군의 무장투쟁이 그치지 않았다.
이들 독립군의 활약이 둔화된 것은 31년9월 일제가 만주를 강점한 만주사변으로 인해 그 활동 무대가 크게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33년10월13일 밤 중국 구국군의 독립군사령부 습격사건은 한국 독립군을 와해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시 구국군의 대리 총 사령인 오의성은 독립군이 친일부대라는 공산주의자인 측근 참모의 모함을 그대로 믿고 일을 저질렀다. 그러나 결국 진상이 밝혀지자 참모를 처형하고 독립군의 총 사령 이청천 장군 이하 요원 80여명을 석방했다.
재만 독립군은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인적자원과 재정 확보에는 유리한 조건을 갖췄지만 구심점이 없어 대일 항쟁력을 조직화하지 못했다. 그 반면 광복군은 조직력은 있었으나 인적·재정적 뒷받침이 없어 독자적인 항쟁력이 미약했고, 특히 국내에 진입하여 일본군과 싸워볼 기회도 갖지 못한 채 해방을 맞았다.
그때 광복군이 연합군을 도와 대일 전투에 직접 참가했었다면 한반도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어쨌든 그 광복군이 썼던 「광복유품」이 자유중국으로부터 돌아와 독립기념관에 전시될 것이라고 한다. 감개무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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