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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포기할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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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종윤 기자 중앙일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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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윤
경제부장

빚은 나쁜가. 개인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빚을 지는 건 불가피하다.

전쟁을 치르거나, 천재지변이 생겼을 때 나랏돈을 들여야 한다. 경제에 쇼크가 왔을 때도 돈을 풀어야 한다. 국민에게서 세금을 걷어 비용을 마련하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경기가 좋지 않은데 세금이 잘 걷힐 리 없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요국이 나랏빚을 내 분투한 게 대표적인 예다.

국회 심의 중인 2017년 예산안에는 건전한 나라 살림과 성장이라는 두 가치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나라 살림을 건전하게 꾸리는 범위 안에서 성장도 꾀하겠다.’ 토끼 두 마리를 한꺼번에 잡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도 저도 아니면 토끼 두 마리, 다 달아날 수 있다.

내년 총지출 규모는 처음으로 400조원을 돌파했다(400조7000억원). ‘수퍼 예산’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속내를 뜯어보면 딴판이다. 올해 본예산에 비해 3.7% 늘어나는 데 그쳤다. 최근 5년간 평균 총지출 증가율(5.0%)에도 못 미친다. 2일 국회를 통과한 추가경정예산까지 감안하면 총지출은 내년에 0.5% 증가에 머문다.

반면에 총수입은 올해보다 6.0%나 늘어나는 것으로 짰다. 총수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국세 수입은 241조8000억원으로 8.4% 증가할 것으로 잡았다. 세금은 많이 걷히는데 씀씀이를 적게 잡았다. 게다가 기획재정부는 내년 경상성장률을 4.1%(실질성장률 3.0%+물가상승률 1.1%)로 예상했다. 총지출 증가율이 경상성장률도 못 따라가는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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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왜 이렇게 씀씀이가 적어졌을까. 여기엔 나랏빚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있다. 예산안에 따르면 내년 나라 살림 적자 규모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1.7%에 그친다. 올해의 2.4%(추경 포함)보다 낮다. 중앙정부 국가채무는 682조7000억원으로 GDP 대비 40.4%가 된다. 이후 이 비율이 죽 이어진다.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2020년까지 40% 선(40.4~40.9%)에 머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국가채무 비율 평균은 84%다. 한국의 재정, 꽤 괜찮다는 소리 들을 만하다.

그런데도 씀씀이가 깐깐한 것은 미래에 대한 고민과 걱정 때문이다. 한국 재정의 아킬레스건은 공기업 부채와 고령화에 따른 복지 지출 확대다. 이미 공기업 부채는 400조원이 넘었다. 공기업이 망하면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 사실상 국가부채다.

고령화의 속도는 무척 빠르다. 15세 이상 65세 미만 생산가능인구는 올해 72.9%를 정점으로 감소해 2040년에는 56.5%에 달할 전망이다. 이때가 되면 국민의 절반만 일을 하게 된다. 대신 복지 지출은 무너진 둑을 뚫고 나온 물처럼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기재부에 따르면 현재의 복지제도를 유지만 하더라도 2040년이 되면 한국의 GDP 대비 복지 지출 규모는 22.6%에 달해 OECD 평균 수준에 도달한다.

착잡하다. 나라가 늙어 가니 성장이 주춤한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평균 경제성장률은 3.0%에 그쳤다. 한국은행이 추산한 2015~2018년의 잠재성장률(물가 상승을 유발하지 않고 달성할 수 있는 성장률)도 3.0~3.2%에 머문다. 한은은 그나마 후한 편이다. 민간 경제연구소의 잠재성장률 전망치는 2%대 중·후반이다. 한국 경제는 저성장의 덫에 빠져 있다. 이건 부인할 수 없다.

정부가 쓸 수 있는 카드는 크게 봐서 두 가지다. 통화량과 금리 조절을 통한 통화정책과 나랏돈을 푸는 재정정책이다. 둘 다 어정쩡하다. 통화정책은 사실상 이도 저도 못할 궁지에 몰렸다. 경기를 생각하면 금리를 더 내려야 하지만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곧 기준금리를 올릴 기세다. 한국은행이 현재 1.25%인 기준금리를 더 내리기 힘든 이유다.

나랏돈을 더 쓰라고 얘기하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빚을 과감히 낼 수 없다. 이미 나랏빚이 늘어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1997년 11.9%에 불과했던 국가채무 비율은 20년 만에 40%를 돌파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4년 만에 나랏빚이 거의 200조원 가까이 불어났다.

재정 건전성 확립과 성장이라는 목표는 형용 모순이다. 달성이 어렵다. 예산안이 엉거주춤해진 이유다. 그런데도 기획재정부는 ‘확장 예산’이라고 외쳤다. 시장에서는 ‘긴축 예산’이라는 메아리로 답했다.

결국 선택지는 분명하다. 규제완화와 구조개혁밖에 없다. 두 손발이 묶였다면 몸의 체질을 개선하는 방법으로 활로를 찾아야 한다. 박근혜 정부의 4대 개혁은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노동개혁은 사실상 좌초된 분위기다. 공공·교육·금융개혁의 성과도 초라하다. 남은 임기는 1년5개월이다. 이제 곧 대선 국면으로 들어간다. 대권만 논한다. 벌써 경제 체질 개선은 물 건너갔다는 분위기다.

이렇게 포기할 것인가. 경제 엔진은 차갑게 식어 가고 있다. 엔진이 꺼지도록 놔둘 것인가. ‘구조개혁’은 약속을 중시하는 박 대통령이 국민과 한 약속 아닌가.

김 종 윤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