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신민의 직선제|타협 어려운 「성역」으로 굳어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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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연내 합의 개헌」의 공동목표가 세워지고 국회헌특이 곧 구성될 단계에 있으면서도 여야간의 개헌논의는 한마디로 「직선제냐, 아니냐」는 수준에서 한 걸음의 진전도 없다.
신민당은 창당이래 대통령중심제하의 직선제만을 줄기차게 주장해왔고 민정당은 의원내각제를 굳혀가고 있지만 양쪽 주장의 핵심은 직선이냐, 아니냐 하는 집권자결정방식에만 전선이 형성돼 있는 것이다.
이 직선제와 간선제의 대결은 각각의 대의명분 뒤에 정권획득과 유지의 강한 의지 내지는 절박한 생존논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생명을 건 한판 승부의 성격마저 띠고 있고 화해와 양보를 그만큼 어렵게 하고 있다.
직선 대 간선의 예각적 대립이야말로 개헌정국의 가장 큰 난제임에 틀림없다.
신민당의 직선제는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겠다」 는 소박한 국민적 여망과 현정권에 대한 정통성 시비의 상징적 의미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으며 2·12총선에서의 대 국민 공약과 당론확정이란 과정을 거친 뒤 진정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한 유일한 수단이란 논리로 이젠 옴짝달싹도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신민당이 직선제를 처음으로 내세운 것은 85년1월18일 창당대회 때.
송원영 전당대회의장이 전날 밤 손수 밤새워 만들어온 정강·정책을 발표하면서부터다. 워낙 급조하는 바람에 인쇄조차 못했다.
창당준비과정에서 두 차례쯤 개헌의 방향이 거론됐으나 창당과 동시 선거전에 돌입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어서 진지한 논의도하지 못한 채 우선 선거용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채택했다. 이 때 일부 내각책임제론도 대두되었었다. 그러나 시간에 쫓겨 개헌의 방향, 권력구조문제는 총재 재 선출 문제와 함께 총선이후로 미루기로 하고 부랴부랴 「대통령을 내 손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었고 이것이 국민들에게 강력하게 어필하는 결과를 낳았다.
논의의 생략을 두고 당내직선반대자들이 재검토를 주장했으나 『직선제는 80년부터의 당론이며 총선 민의, 국민에 대한 약속』이란 큰 목소리에 묵살되고 말았다.
직선제가 총선에서의 민의라는 데는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11대 민한당 때의 한 중진은 최근 자신의 저서에서 『2·12 총선결과는 이 체제와 정권을 혐오하는 반사적 지지이며 보수바탕에 변혁을 갈구하는 소리도 내재돼있다』고 분석했다.
당시 국민이 지지한 직선제는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선거제도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국민의 뜻에 따라 정권이 결정되는 민주제도의 대명사였다』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현행간선제를 정통성 결여 및 제도모순의 상징으로 집중 공략하면서 직선제가 그 반대의 개념으로 활용되어진 것도 사실이다.
직선제는 그해 8월 전당대회에서 정식당론으로 그 위치를 새롭게 한다.
그러나 이때의 당론결정과정도 석연치 못한 대목을 남겼다.
공식토론을 단 한차례도 거치지 않았으며, 총재·부총재를 선출하는 어수선한 와중에 직선제를 기습상정, 전격 통과시켰다. 이때 동반 통과된 사항들이 두 김씨의 고문직 추대와 재야케이스 부총재 2석 확보.
이민우 총재를 재 추대하겠다는 담보로 김대중씨가 내각책임제 쪽으로도 관심이 있던 김영삼씨로부터 직선제확약을 받아냈다는 소문도 있다.
이때부터 비주류의 이철승 의원은 「날치기통과」라고 비난하며 자신의 평소 지론인 의원내각제를 역설했다.
이어 신민당은 당 정책실이 만든 개헌시안을 놓고 2차례의 축조심의만으로 10월20일 본문1백21조와 전문·부칙7조의 개헌안을 정식 확정했다.
유신이전의 제3공화국 헌법 및 80년 「서울의 봄」때 국회개헌특위에서 여야가 합의해 만들었던 개헌안을 주 골격으로 대통령중심제하의 직선제 및 대통령임기는 4년에 1차 중임을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부통령제를 설치하는 것이 새롭다.
신민당은 이 안을 내놓으면서 개헌의 이유로 『유신이후 헌법은 국민의사와 관계없이 집권자의 의도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 이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원상복귀의 논리를 펴고 있다.
아울러 유신이후 간선제에 의해 빼앗긴 국민의 정부선택권·대통령 선출권을 회복하자는 것이 이 시대 국민의 열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창당당시 가건물에 불과했던 직선제는 당 개헌안 마련과 함께 완전하게 뼈대를 갖추게 됐고, 지난 2·12 기습서명이후 시작된 일련의 장외투쟁과정을 거치면서 변형이 어려운 완성품으로 고정화됐다.
전국 주요도시의 개헌 추진위 결성대회와 지구당 개편대회에서 직선제는 고정 메뉴로 수없이 되씹어졌고 다져졌다.
「4·30」청와대회동에서 임기 내 개헌이 제시되자 한때 『정부·여당이 호헌선을 후퇴한 만큼 신민당도 직선제를 양보해야 된다』는 호혜적 양보론과 함께 의원내각제가 당내에 한때 다시 고개를 드는 기미도 있었으나 두 김씨, 특히 동교동 측의 서슬 퍼런 철퇴에 즉시 움츠러들고 말았다.
김 대중씨는 『직선제는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를 건넜다. 포기할 경우 신민당은 설자리가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이 총재는 『직선제 당론과 다른 이야기를 할 경우 엄중 문책하겠다』고까지 경고, 토론의 여지조차 배제해 버렸다.
여기에 재야·운동권세력까지 직선제에 적극 가담하고 있다.
일부 재야는 신민당의 헌특 참여까지를 극렬히 비난하면서 내각책임제나 이원정부제로의 타협가능성에 매서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어 더욱 운신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신민당 의원 중엔 내각책임제를 선호하는 다수의 침묵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철승 의원처럼 내각제 소신파가 있는가 하면 직선제로만 버티다가 파국을 맞는 것보다는 차선으로라도 타협을 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잠재해 있다.
이들은 5.29 노사회담에서 이 총재가 「국민의 자유로운 정부선택권보장」을 먼저 제의한 대목과 김영삼 고문의 「합의개헌은 가능」이란 발언에 유의하고 있다.
민정당 쪽의 주장을 빌지 않더라도 정부를 자유 선택할 수 있는 제도엔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 신민당 의원 중엔 『이로써 신민당은 직선제 틀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이 총재는 『정부선택권보장은 직선제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부연 설명함으로써 논란의 여지를 없애긴 했다.
김 고문의 『합의개헌 가능』발언에선 양보가능의 의지를 읽고 있는 것이다. 타협이란 상대방을 의식한 것이며 아울러 상호 절충과 양보의 자세를 바탕에 깔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김 고문이 세차게 밀어붙이다 마지막 순간 새 국면을 조성하곤 하는 특유의 장기를 상기하곤 한다.
그러나 그동안의 당론화과정, 이 총재와 두 김씨의 역학관계, 재야의 압력 등 당 내외의 여러 요인에 따라 앞으로 직선제가 변형될 것을 점치기는 쉽지 않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직선제를 하면 우리가 지기 때문이 아니다』는 여권의 말이나 『직선제 주장이 대권에의 개인적 욕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는 야권의 부인이 국민들에게 진정한 목소리로 받아들여질 때만이 대 협상의 터전이 마련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허남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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