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의령 옥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의령 옥씨의 시조는 옥진서.
「당태종 9년 (635년) 사학의 유생을 가르치는 여덟재사중 한사람으로 뽑혀 고구려땅을 밟았고 의춘(지금의 의령)군에 봉작됐으나 고구려가 망하자 신라 문무왕10년 (670년)에 이르기까지 35년간에 걸쳐 군충·수기·치인등 시서예악의 문도를 펴 문혜공의 시호를 받았다」고 의령옥씨 세보에 전한다.
후손들이 의령을 중심으로 세거하면서 관향을 삼은 연유다.
그러나 난세를 거치며 대물려 내려오던 전적과 문집등이 실전돼 시조이후 세계가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일부에선 옥씨가 고려왕족 옥씨가 변성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야사로 전하는 변성설의 골자는 이렇다.
위화도회군으로 여조를 무너뜨린 이성계는 전국에 영을 내려 왕씨 일족을 잡아다 거제도와 강화도 두 곳에 집단 수용했다.
이성계는 끝내 후환을 없애려고 잔인한 학살을 감행했다. 왕씨 일족을 수장시키도록 명령한 것이다.
자그마치 10여만명. 용케 목숨을 건진 소수의 왕씨들은 옥·전·김씨등으로 변성, 혈맥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전국에 흩어진 2천여가구 (1만여명)의 후손 가운데 거제를 뿌리로한 옥씨가 절반이상이라는점도 왕씨의 수난사와 연관을 느끼게 하고 여말 이인임을 도와 우왕을 옹립하고 찬성사에 오른 왕안덕과 같은 이름으로 옥씨 세보에 옥안덕이 기록돼 있는 등 단편적인 자취가 없는 것은 아니나 확인은 불가능한 역사의 미궁.
조선조 순조4년(1804년) 6개 파보를 처음으로 한데 모아 펴낸 옥씨네의 갑자대종보는 변성설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돌리고 여조신종7년 (1204년) 창정을 지낸 옥은종을 1세로 받들고 있다.
은종부터 4세에 이르기까지 옥씨네는 관령골의 호장으로 의령에 뿌리를 내렸다. 5세 여가 문하시낭평장사에 올라 가문의 융성을 다졌다.
공양왕조에 문과급제한 7세 사온은 치은 길재와 더불어 정몽주의 문하에서 수학한 당대의 명유.
여조종박사판사·진현관제학·예조참의를 거쳐 문하시낭평장사에까지 올랐으나 고려가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 의령골 깊숙이 들어가 여조수절신으로 일생을 마쳤다.
부서 오의 충절을 다한 그의 지조는 두문동 화현에 버금가는 위국순절의 귀감이 돼 두문절의록에 기록되었다.
그의 둘째아들 윤은 옥씨네가 자랑하는 청백리.
그는 조선조 세종조에 문과급제, 여조이후 끊긴 가문의 벼슬길을 다시 열고 집현전학사와 직제학을 거쳐 세조10(1464년) 강원도관찰사로 임명됐다.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규정비가 세워지고 돌아가자 임금이 친히 그 청백을 칭송한 만강을 보낸 것이 후손들에 대물려 전해지고 있다.
윤의 아우 고도 청백리로 전해지는 인물. 벼슬은 사헌부장영집현전교리에 머물렀으나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은 성리학자로 이름이 드높아 안동 묵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윤의 아들 화와 조카 현도 고필재 김종직과 교우한 문장가이며 경술가로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 영남학맥을 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천보·춘화·귀영·계성등이 곽재우의 부장으로 출전, 춘화는 진주성싸움에서 장렬한 전사를 했고 계성은 왜적을 추풍령까지 내몰아 선무이등공신록에 오르는등 가문을 빛냈다.
그중에도 우뚝한 거목은 12세신변.
27세에 임난을 피하지 못하고 포로가 되자 칼을 들이대는 왜적을 당당한 태도로 꾸짖어 기를 꺾었다.
이를 장하게 여긴 왜장이 그를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아 풍신수길에게 보내 예로 맞아들였으나 『나는 조선인으로 이국의 예우를 받을 수 없다』며 7년동안 항거하는 충절을 지켰다.
뒷날 조정에까지 알려져 장악원정의 벼슬이 주어지고 행종조에는 다시 호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신변의 아들 진성은 이조참판을 지냈고 손자 명규는 숙종조에 거제로 귀양간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 들어 주자학을 이어 받았으며 명규의 아들 삼헌은 반곡서원을 세우고 송시열의 영정을 모셔와 배향했다.
그후 삼소·무헌·찬헌등 형제와 현손·대용은 벼슬을 멀리하고 송시열의 학통을 이어받아 주자학을 재정립하는데 일생을 바쳐 향내 사림들은 이들을 옥문사현으로 받들어 거제죽천사에 배향하고 있다.
12세 인의 고명딸 옥낭자는 왜란당시 왜적에 포로가 돼 욕을 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목숨을 걸고 항거하다 양팔과 양발목 등 사지가 잘려 숨겼다. 그의 정절을 높이 산 조정에서 정려문을 세웠다. 옥씨네는 가문을 연지 8백년이 가깝도록 이처럼 충효의 열의 가풍을 굳건히 지켜오고 있다.
일제암흑기에는 옥관빈이 1919년 3·1독립운동후에 서간도를 거쳐 상해로 망명, 김구를 비롯한 김도면·양기택등 이른바 16인독립투사의 한 사람으로 조국광복에 몸바쳤다.
옥치상은 1932년 대구사범심상과3학년때 항일단체인 비밀독서회를 조직, 동지를 규합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해방후에 건국초기 특별검찰관과 법무차관을 지낸 옥동형씨가 법조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고 옥창호 (5·16당시 국가재건최고위원)·옥만호(전공군참모총장 주중대사)·옥조남 (전국회의원)·옥황남 (전서울고법부장판사변호사)·옥기진 (치안감 경찰학교장)씨 등이 각계에서 활약한다. 글 사진 이용우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