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贊 “지하자금 끌어내고 내수 부양에 효과” 反 “인플레 유발하고 경제 혼란 불가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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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호 18면

# 친구간의 대화친구 1: 너 대기업에 취직했다며? 축하해. 연봉이 얼마야?친구 2: 연봉? 4만5000원.친구 1: 응? 얼마?


# 부부간의 대화부인: 여보, 우리도 서울 아파트로 이사 가자. 값이 얼마나 하지?남편: 서울 아파트? 웬만한 곳은 60만원 넘지.부인: 뭐, 뭐라고?


두 대화에서 ‘친구 1’과 ‘부인’은 2016년 현재를 사는 사람이다. ‘친구 2’와 ‘남편’은 한국에서 돈의 액면 단위를 1000대 1로 줄인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을 실시한 후를 사는 사람이다. 5000만원짜리 자동차는 5만원, 100만원짜리 주식은 1000원, 4500원짜리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4.5원이 되는 세상. ‘친구 1’과 ‘부인’, 그리고 우리는 리디노미네이션에 적응할 수 있을까? 한국에 리디노미네이션이 필요하긴 한 것일까?


화폐(통화)개혁으로 불리는 리디노미네이션은 돈의 ‘액면가(denomination)’를 ‘다시(re)’ 바꾸는 것이다. 1만원을 1000대 1 비율로 바꾸면 10원이 되고, 10대 1로 변경하면 1000원이 된다. 돈의 가치는 종전 그대로 1만원이다. 리디노미네이션은 물가가 통제 불가능한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으로 치닫고 통화가치가 급락할 때 여러 나라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쓰이곤 했다. 경제위기를 타개하거나 새 정권이 들어설 때 충격 요법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유로화 도입으로 화폐 단위를 바꾼 유로존 회원국을 제외하면 1960년 이후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한 60여 개 나라가 대부분 그랬다(표 참조). 그런데 이런 이유와 크게 상관없는 한국에서 잊을 만하면 리디노미네이션 논란이 불거진다. 2002년에는 한국은행이 박승 전 총재 지시로 전담팀까지 만들어 추진했다가 정부 반대로 무산됐다. 2004년에는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불을 질렀다. 이 잡지는 ‘한국은 화폐단위에서 국제사회의 괴짜(International oddity)’라며 ‘1유로당 1원으로 바꾸는 게 어떻겠느냐’고 훈수를 뒀다. 그해 9월, 화폐단위를 ‘환’으로 하고 비율을 1000대 1로 줄이는 내용의 한국은행법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됐다. 이후로도 1~2년에 한 번씩 리디노미네이션 논란은 수면 아래위를 오갔다. 지난해에는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국정감사장에서 “(리디노미네이션) 필요성에 공감한다”고 말해 파장을 일으켰다. 한은은 곧장 “원론적인 발언”이라며 수습했지만 논란은 길게 이어졌다. 올해는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총대를 멘 모양새다. 그는 “더 늦기 전에 정부와 한은이 적극 나서 리디노미네이션을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어려운 발음만큼, 한국에 리디노미네이션이 필요한가를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최운열 의원은 “카페나 음식점에 가면 커피를 4.5원, 파스타를 12.0원 식으로 쓰는 곳이 많다”며 “리디노미네이션은 이미 우리 생활 전반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배영목 충북대 경제학과 교수는 “(업소들이) 높은 가격에 착시를 주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최 의원은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배 교수는 리디노미네이션을 주제로 논문을 썼다.


더 큰 쟁점이 많다. 박승 전 한은 총재는 2010년 발간한 회고록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에서 이런 경고를 남겼다. “언젠가는 화폐개혁을 미룬 것을 후회할 때가 올 것이다.” 이에 대해 최 의원은 “동료 의원들이나 경제 부처 고위 관료, 학자들과 얘기해 보면 리디노미네이션에 공감하는 분들이 많다”며 “다만 아무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고 하지 않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배영목 교수는 “공감하는 것과 시행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라고 지적했다. 한쪽에서 하자고 하고, 다른 편에서는 하면 안 된다고 하는 리디노미네이션, 쟁점은 크게 세 가지다.


“원화 위상 낮아” vs “0 뺀다고 가치 오르나”

최운열 의원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달러 대비 환율이 네 자릿수인 나라는 한국뿐”이라며 “리디노미네이션을 통해 원화의 국제적 위상을 올려야 한다”고 말했다. 중앙SUNDAY가 글로벌 리서치 회사인 모닝스타 자료를 바탕으로 138개국의 환율(9월 1일 기준)을 조사했더니, 한국은 26번째로 1달러당 환율 액면가가 높았다. 그러나 배영목 교수는 “달러와 1대 1이 된다고 원화의 실질가치가 오르는 것은 아니다”며 “국가 경쟁력을 키워 자연스럽게 원화가치를 높이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반면 김영익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낮아진 한국의 산업 경쟁력이나 노동생산성 등을 봤을 때 불가능한 얘기”라고 반박했다.


“소비 늘어날 것” vs “물가만 오를 것”

찬성론자들은 리디노미네이션이 경기를 살릴 것으로 본다. 화폐 변경에 따른 ATM 등 설비 교체 등으로 내수 부양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화폐 단위가 작아짐으로써 소비가 더 늘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대론자들은 인플레이션을 우려한다. 100원 이하 단위가 절상돼 물가상승 압력이 생기고 상인들이 3.8원을 4원으로 받고 싶어하는 우수리 효과(단수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 의원은 “달러나 유로의 센트처럼 작은 단위 통화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1980년 이후 발행되지 않지만 여전히 법정통화인 전(錢) 단위를 활용하면 된다는 주장이다. 또한 “리디노미네이션 단행 후 인플레이션 문제가 터진 나라는 많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지하자금 끌어내” vs “도로 장롱 속으로 들어가”

김영익 교수는 “한국의 통화승수가 급락한 것은 현금이 어딘가 묻혀 있다는 것”이라며 “화폐개혁은 이런 돈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고 세수 확대에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그러나 효과가 미미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박종규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예금 동결 등의 강력한 조치가 없다면 장롱 속 돈이 밖으로 나와 더 큰 단위 돈으로 변해 다시 장롱 속으로 들어갈 것”이라며 “일정기간 동안 예금을 강제하는 것은 한국경제의 규모를 봤을 때 무리”라고 주장했다.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한 다른 나라에서도 지하 경제 양성화에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다는 주장도 많다.


내년 대선 전후 재부상 가능성 커지난 6월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리디노미네이션 가능성에 대해 “전혀 계획이 없다. 그것을 하기에는 혼란이 크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영익 교수는 “해외여행 가서 다른 나라 화폐를 처음 쓸 때는 헷갈리지만 곧 익숙해진다”며 “부유층들은 세금 문제 등으로 불안해하겠지만 일반 국민의 저항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리디노미네이션은 결국 정치적 결단에 달렸다. 최 의원은 “리디노미네이션은 국회 동의를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한은이 결정해 대통령의 승인을 받으면 당장 오늘이라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배영목 교수는 “전혀 필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논의를 이어가는 숨은 뜻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한국은행은 오래 누적된 통화관리의 실패를 리디노미네이션으로 덥고 새 출발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것이고, 산업·금융계에선 인플레 효과를 기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소 잠잠해졌지만, 리디노미네이션 논쟁은 곧 다시 수면 위로 오를 가능성이 크다. 익명을 요구한 한 야당 의원은 “이번 정부에선 어렵고, 내년 대선에서 정권이 바뀌면 리디노미네이션을 강력하게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주열 총재의 말대로 “국민적 공감대와 합의를 끌어내기 위한” 공론의 장이 열려야 하는 이유다.


김태윤 기자 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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