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슬픔-지리산|「한길역사기행」을 다녀와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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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재작년 6월 어느날 예비군 훈련을 받다가 우연히 신문조각 한장을 주워 읽고는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지리산 10대 절경중의 하나인 불일폭포에 관한 기사였는데 높이가 60여m되는 그 폭포가 남한에서 제일 긴 폭포라는 말에 하루 빨리 가보고 싶은 충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혼자 하동방면으로 해서 화개면 운수리마을로 둘어선 것이 지리산과의 첫 대면이었다.
그때 어스름 무렵 쏟아지는 비에 흠뻑 젖은 몸으로 깊숙한 계곡밑에 홀로 서서 저녁 안개 너머로 폭포를 올려다 보던 감격은 나를 영영 지리산 자락에 묶어놓고 말았다. 내가 어디를 가든 그 산자락은 길게 뻗어와 내 몸둥이를 휘감은 또아리를 풀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지난 2월14일 방영된 『지리산의 4계절』이라는 MBC프로그램을 모조리 메모하게 만들었고 이병주의 『지리산』을 통독하도록 하였고 지난 3일부터 5일까지 한길사 역사기행에 맨먼저 4만원이라는 등록금을 내고 부랴부랴 57명의 일행을 따라나서게 만들었다.
지난번 불일폭포만 보고 돌아온 지리산과의 대면은 새끼손가락을 만져본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기에 화엄사에서 노고단으로 올랐다가 피아골로 내려가는 장장 12시간 가량의 이번 산행을 통해서는 지리산의 젖꽃판이라도 더듬어볼 작정이었다. 사실 그 산행은 거대한 어머니의 젖무덤을 올랐다가 내려가는 기분을 자아내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참샘터, 들거지, 국수등, 집선대를 거쳐 무넹기 노고단에 이르는 오르막길은 그야말로 다리 근육이 어그러질 듯한 고통을 가해왔지만 노고단에서 어머니의 젖꼭지가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은 환각을 힘입으며 오르고 또 올랐다.
과연 거기에는 죽은 영혼들에게도 젖줄을 대어주고 있는 듯한 어머니 젖꼭지 모양의 돌제단이 봉곳이 쌓여져 있었다. 지기 시작하는줄 알았는데 사실은 피기 시작하는 진달래 무더기 너머로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굽이굽이 산자락, 계곡물, 섬진강줄기, 구름바다,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 자그만 동네들…그 풍경들이 자아내는 황홀한 슬픔. 그렇다, 그것은 황홀한 슬픔이었다.
무넹기 노고단에 우뚝 서서 저 아래를 내려다 보고있는 나는 신라시대 김유신부대의 화랑이었고 이성계를 거부한 백록동 그 고려 스무 충신중의 하나였고 임진왜란때 서산대사를 따르던 승병이었고 구한말에 일본제국주의와 맞서 싸우던 고광순 휘하의 의병이었고 그리고 눈에 핏발이 선 산도적이었고 피난민이었고 징용기피자였고 빨치산이었고 토벌꾼이었다.
그런 생각들이 들자 나의 황홀은 그만 슬픈 황홀이 되었고 급기야 그 모든 것은 홀홀한 슬픔이 되었다.
그와 같은 감정은 공기마저 연초록빛인 듯한 32km의 숲무더기 피아골로 내려서면서 더욱 짙어졌다. 일행중의 한사람인 숙희라는 이름의 직장아가씨는 피아골에 대해 설명해준 송기숙·이이화·박현채 교수들의 여관방 강의를 상기해서인지 말을 지어내어 나직이 중얼거렸다.
『피(패)를 심어 피를 먹고살다가 피(혈)를 흘린 우리 조상들의 골짜기!』
그 피가 삼홍소까지 흘러 내려와서 봄이면 진달래·철쭉으로, 가을이면 단풍으로 면면히 피어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전에는 피(패)밭으로 경작되었을 돌둑 배미들이 산기슭을 타고 층층이 쌓여져 있는 그 생존으로 향한 몸부림, 아니 역사로 향한 그 민중의 끈기와 뚝심을 흘끗흘끗 쳐다보면서 왜 지리산 자락이 나를 휘감고 있는지를, 왜 이번 역사기행이 지리산으로 이어졌는지를 조금이나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와 이틀간 보지 못한 신문을 펴들었을 때의 그 충격과 슬픔… 신문 가득히 배어있는 피아골 냄새. 아, 다시는 피아골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조성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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