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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이 살구·자두 선물, 아내는 향초 만들며 보답할 준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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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3호 22면

외출에서 돌아와 보니 대문에 뭔가 걸려 있다. 살구가 가득 담긴 커다란 비닐봉지다. 굳이 누구라고 귀띔해 주지 않아도 옆집 아주머니의 손길이 느껴진다. 옆집 마당에 있는 튼실한 살구나무가 최근 탐스럽게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는 부엌 발코니에서 보이는 아랫집 자두나무가 요란스레 흔들렸다. 바람 한 점 없는데 자두나무는 홀로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아랫집 할아버지께서 자두 한 봉지를 들고 오셨다.


정이 담겨서일까. 그때 받은 자두도 오늘 받은 살구도 빛깔이 유난히 선명하고 예쁘다. 저녁 무렵 아내는 이웃 분들께 드린다고 향초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집 안 가득 은은하게 풍기는 시트로넬라향이 나쁘지 않다. 창밖으로 아랫집 할아버지의 하모니카 소리도 들린다. 가끔 할아버지는 발코니에 나와 하모니카를 부신다. 하모니카 소리는 언제 들어도 구슬프다. 비록 그의 연주는 기교를 부리거나 다양한 레퍼토리가 있지는 않지만 구수하고 맛깔 난다. 이 저녁 부엌에 앉아 마주하는 빛깔과 향기, 소리 모두 사랑스럽다. 여러 가닥으로 연결된 행복의 고리에 맑은 이슬이 맺히는 느낌이다.


무더운 여름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 열기는 밤에도 열대야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작렬하고 있다. 늦은 밤. 아이들을 모두 재우고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 열어 놓은 창으로 스며드는 후끈한 바람이 여름을 실감케 한다. 어둠 속 정적을 깨고 나부끼는 나뭇가지 소리가 그나마 작은 위안을 준다. 방충망에 한가득 달라붙은 온갖 곤충들은 오늘 밤 내 방의 불빛을 초대장 삼아 모여든 무도회 손님들이다. 붕붕거리는 날갯짓을 하며 연신 방충망에 부딪치는 오늘의 주인공 말벌, 하루살이와 강도래, 모기, 나방들은 여러 모양과 색깔로 자리를 빛내 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단체로 참석해 준 선녀나방은 최근 골칫덩이로 떠오르는 반갑지 않은 녀석들이다. 작은 사마귀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다른 곤충들을 치근덕거리지만 응해 주는 이 하나 없다. 느그적느그적 커다란 하늘소 한 마리가 관심도 없다는 듯 무도회장을 가로질러 사라지고, 창틀 근처에 쳐 놓은 거미줄에 걸린 노린재는 버둥거리다가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밤 공기를 어지럽히고 있다.

나는 발코니에 나설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물끄러미 턱을 괴고 앉아 가 보지도 못한 어느 열대지방의 밤을 떠올리고 있다. 선풍기가 끈적끈적한 밤 공기를 열심히 섞어 주고 곤충들의 한밤 무도회는 절정에 무르익는다. 자, 그럼 오늘 밤 무도회는 여기까지~ 내일 또 모여 주세요! 불을 끄고 잠을 청하러 가는 등 뒤로 수많은 곤충의 아쉬움 섞인 한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라디오 아침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서울 시내 교통 상황이 먼 나라 이야기처럼 아득하다. 교통 정체나 주차 걱정을 하지 않는 시골에서 살다 보니 밀도 높게 모여 살던 도시에서의 삶이 기묘하게만 느껴진다. 이곳은 관공서를 비롯하여 도서관, 가게들까지 대체적으로 여유롭다. 애용하는 단골 마트의 풍경은 무릇 이국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오래전 몇 개월 동안 북미 대륙을 횡단하며 그림을 끼적였던 적이 있는데, 그 여행에서 본 미국 시골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듬성듬성 자리한 단층 가게들과 커다랗고 텅 빈 주차장, 그리고 황량한 주유소들. 이곳에서 살포시 그때의 기분이 겹쳐지기도 하니 여유로움에 대한 동경은 늘 내면에 자리 잡고 있었나 보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홀로 장을 보고 주차장으로 나섰을 때의 어떤 황량함. 낮을 달구었던 태양이 저물어 가는 여름 저녁은 하루 일과를 끝내고 이제 휴식이라는 편안한 시간을 의미하는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시골에서 살아가니 사랑하는 것들만 부쩍 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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