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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우2016] 수당까지 집에 부친 김밥집 딸 ‘짝소’…“난 엄마 꿈, 아빠 자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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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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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의 별명은 ‘짝소(작은 소희)’다. 동명이인 태권도 선배와 구별하기 위한 별명이지만 요즘엔 작은 키(1m64㎝)에도 당차게 경기한다는 의미다. 김소희는 영리한 경기 운영으로 체격 큰 선수들을 차례로 꺾고 우승했다. 49㎏급 결승에서 티야나 보그다노비치(세르비아)에게 옆차기 공격을 하는 김소희(왼쪽). [리우=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피앤지]

화마(火魔)가 가족을 할퀸 건 그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충북 제천에서 큰 갈빗집을 운영하던 그의 부모는 화재로 모든 것을 잃었다. 주방장이 부탄가스를 바닥에 떨어뜨린 게 원인이었다. 손님들이 대피할 만큼 큰 화재였고, 그의 부모는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김소희, 태권도 49㎏급 금메달
올림픽엔 46㎏급 없어 49㎏ 출전
170㎝ 넘는 장신 상대 4명 모두 꺾어
부모님, 운영하던 갈빗집 큰 불
빚더미 속 뒷바라지하기도
박지성처럼 활동량 좋아 ‘산소통’
“귀국하면 제주도로 가족 여행”

그로부터 15년이 흘렀다. 소녀는 태극마크가 가슴에 새겨진 흰색 태권도복을 입고 리우 올림픽에 출전했다. 18일 리우 올림픽 태권도 여자 49㎏급 결승전이 열린 카리오카 아레나3. 브라질 관중은 서툰 한국말로 김소희(22·한국가스공사)의 이름을 연호했다. 브라질 관중들 사이에선 그의 부모님이 초조하게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태극기를 든 아버지 김병호(52)씨와 어머니 박현숙(52)씨. 두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긴장한 모습이었다.

김소희는 매트 위를 뛰어다녔다. 그러고는 자기보다 키가 5㎝ 이상 큰 선수들을 차례로 쓰러뜨렸다. 파니팩 웅파타나키트(태국)와의 8강에선 2-4로 뒤진 종료 4초 전 전광석화 같은 머리 공격으로 3점을 뽑아내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야스미나 아지에즈(프랑스)와의 4강에서는 연장 끝에 골든 포인트를 땄다. 그리고 티야나 보그다노비치(세르비아)와의 결승전. 7-6으로 쫓기던 김소희는 종료 후 비디오 판독을 거친 끝에야 힘겹게 금메달을 확정지었다. 관중석 난간에서 딸의 손을 꼭 잡은 어머니 박씨는 “소희가 금메달을 따겠다는 약속을 지켰다”며 눈물을 흘렸다.

15년이 흘렀지만 박씨는 당시의 사고 이야기를 하는 것을 지금도 꺼린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해 빚을 다 갚은 박씨는 “지금은 충북 제천에서 조그만 음식점을 하고 있는데 어디인지는 공개하고 싶지 않다. 행여 딸에게 상처가 될까 봐…”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김소희는 “우리 엄마는 사장님이에요. 김밥집 사장님”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지금은 세계 최고의 태권도 선수가 됐지만 꼬마 김소희의 체력은 무척 약한 편이었다. 박씨는 “소희가 어릴 때 수건이 흥건히 젖을 정도로 코피를 쏟아 응급실에 실려가기도 했다. 크면서 인형보다 장난감 총, 치마보다 트레이닝복을 좋아했다”며 “기계체조 선수였던 남편이 소희에게 운동을 시켜 보자고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태권도를 시켰더니 무척 좋아하더라. 하루에만 도장을 서너 번씩 갔다”고 전했다.

서울체고 진학을 앞두고 김소희는 두 달간 엄마와 함께 개인훈련을 한 적이 있다. 박씨는 “나는 매일 새벽 한겨울 찬 공기를 가르고 자전거를 탔고, 소희가 악착같이 뒤를 따라 뛰었다”며 “소희가 축구 선수 박지성(35)처럼 활동량이 좋아 ‘산소통’이란 별명을 얻었다. 마라톤 대회에 나가 3위에 입상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중3 때 1m53㎝에 불과했던 김소희의 키는 고교 때 10㎝ 이상 자랐다. 김소희는 “힘들게 뒷바라지를 해 주시는 엄마를 위해 꼭 성공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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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에서 김소희를 응원하는 어머니 박현숙씨(왼쪽)와 아버지 김병호씨. [리우=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피앤지]

김소희에게 올림픽은 벅찬 도전의 무대였다. 그는 46㎏급의 최강자였지만 올림픽엔 이 체급이 없어 체중을 늘려 49㎏급에 나섰다. 리우 올림픽에서 그가 상대한 선수 4명의 키는 모두 1m70㎝를 넘었다. 세계선수권대회 53㎏급에서 뛰는 선수들이 체중을 줄여 49㎏에 나왔기 때문이다. 키가 1m64㎝에 불과한 김소희는 긴 다리로 위협적인 발차기를 하는 상대의 안쪽을 파고들어 돌려차기와 뒤차기를 구사했다. 그렇게 키가 큰 골리앗들을 차례로 쓰러뜨렸다.

매번 힘든 경기를 하는 딸이 엄마는 그저 안쓰럽다. 박씨는 “소희가 고1 때 식당 벽에 ‘국가대표가 돼 부모님 해외여행을 시켜 드리겠다’고 낙서를 했다. 그냥 웃고 말았는데 이번에 한 기업의 후원을 받아 리우 올림픽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소희는 정말 효녀다. 부모에게 집을 사주겠다며 월급의 대부분을 모았다가 보내 온다. 대표팀 훈련 수당까지 모두 보내오는데 도저히 그건 쓰지 못하겠더라”고 덧붙였다.

김소희의 휴대전화 배경화면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나는 엄마의 꿈이자 아빠의 자랑이다.”

그는 “넉넉하게 자라지 못했지만 강인한 엄마를 보며 많이 배웠다. 엄마가 쓰러졌다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듯 나도 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털어놓았다. 김소희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나왔던 박보검. 김소희는 “부모님께 금메달을 걸어 드리겠다는 약속을 지켜 기쁘다. 한국에 돌아가면 부모님과 함께 제주도로 가족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했다.

리우=박린·피주영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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