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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바람결에 흩날리고 강을 따라 떠도는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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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에 흩날리고 강을 따라 떠도는  #2

의원이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비몽사몽간에 팔목을 내미니 눈을 감고 맥을 짚었다.

“너무 무리했구려. 약을 먹고 며칠 쉬면 좋아질 거요. 가서 지어 둘 테니 받아 가쇼.”

나는 고맙다 말하고 값을 치렀다. 의원은 내일 아침 다시 온다며 일어섰다. 의원이 가는 길을 따라 개 짖는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창밖으로 멀어지는 의원의 등불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간밤에 평소보다 피곤하다 싶더니, 아침에는 눈이 안 떠졌고, 종일 자서 어느새 밤이었다.

사내는 매일 밤 나를 안고 잤다. 끼니도 제대로 챙겨 주지 않았으며 깨지지 않을 물건은 모두 내 등에 옮겼고, 넘어져 물건을 떨어뜨리거나 기운이 없어 사내의 요구를 제대로 받아 주지 못하면 못난 놈이라 웃으며 주먹질을 했다. 지금도 날 범하거나 때릴 때 사내가 웃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사내에게 셈과 글자를 배우긴 했지만 난 장사에 지지리도 소질이 없었다. 물건을 살 때 값을 깎아 달란 말은 가시처럼 목에 걸려 있을 뿐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고, 상대가 깎으려 들 때 버티지도 못했으며, 손님이 묻는 말에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덕분에 사내가 날 때리는 빈도가 잦아졌다. 나는 거의 매일 밤 술에 취한 사내에게 얻어맞고 만신창이가 된 몸을 내줘야 했다.

어느 날 누나를 닮은 계집아이를 보고 밤중에 소리 죽여 울었다. 사내가 잠이 깨 멍든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왜 울고 그래? 아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잘 좀 하지 그래, 그게 그렇게 어려워?”

사내는 거친 손으로 눈물을 닦아 주더니 물건을 늘어놓았다. 여관방에는 우리 둘 뿐이었다. 사내는 날 엎드리게 하더니 다짜고짜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저건 얼마랬지?”

사내가 다정하게 물었다. 나는 달빛에 의지해 물건을 구별하며 값을 말했다. 사내가 나무 주걱을 들더니 엉덩이를 때렸다. 나는 숨을 죽였다. 비명 소리에 옆방에서 자던 이들이 깨 불평이라도 하면 더 심하게 맞았다.

“틀렸잖아. 다시 말해 봐.”
사내가 부드럽게 말했다. 제대로 말하면 손으로 성기를 쓰다듬고, 귓불을 깨물었으며, 틀리면 머리카락을 쥐어 잡거나 주걱으로 허벅지를 때렸다. 사내는 내게 너무 크고 버거웠다.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픈데도 사내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저건, 얼마, 랬지?”

사내의 숨이 점점 가빠졌다. 끝이 다가온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울면서 대답했다.

“그래, 제대로 말했는데, 만약에 비단 옷을 입은 자면? 그럼 얼마까지 불러도 되지?”

나는 생각나는 가장 큰 숫자를 말했다. 사내가 호탕하게 웃더니,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다른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내리쳤다. 입을 막지 않았다면 비명을 질렀을지도 몰랐다. 뼈가 부러졌나 싶을 만큼 아팠다.

“야 이 녀석아, 치도곤을 맞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그런, 말도 안 되는, 값을, 말, 하면……! 내 진짜, 너처럼, 못 배우는, 놈은 또, 살다 살다 처음…….”

사내의 몸놀림이 격렬해진다 싶더니 이윽고 멈췄다. 나는 바닥에 쓰러져 숨을 몰아쉬었다. 사내가 내 턱을 들더니 뺨을 갈겼다.

“어딜 물어?”

사내가 내 입을 막았을 때 나도 모르게 물었나 보다. 사내는 옆에 눕더니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이제껏 사내가 꼬여 데리고 나온 아이는 나 하나가 아니었다. 사내는 내게 장사를 가르치기 포기했다. 그 뒤 나도 상품이 되었다. 사내는 값을 흥정해 날 돌렸다. 때로 한 번에 네다섯씩 상대할 때도 있었다. 다른 자들에게 시달려 기진맥진해 돌아오면 그게 사내를 자극해 그런 밤이면 더 심하게 괴롭혔다. 사내는 그자들의 물건 크기는 어땠는지 물었고, 자기만 한 사내는 없다는 말을 하게 했다. 내가 입을 놀릴 힘조차 없으면, 자기가 범할 때는 생생하더니 누가 그렇게 잘 하더라며 날이 밝을 때까지 몇 번이고 범하며 놔주지 않았다.

큰 장이 열리는 도시에 간 날이었다. 큰 장에서는 물건을 파는데 바빠 나까지 흥정할 여유가 없었다.

“이건 어디에 쓰는 물건인가?”

푸른 옷을 입은 늙은이가 물었다. 늙은이가 가리킨 물건은 꼭 갈퀴처럼 생겼는데 크기는 숟가락만 했다. 이게 뭐더라? 하필 사내는 옆 상인과 자리싸움을 벌이느라 날 도울 여력이 없었다.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사내는 싸우는 중에도, 오줌을 싸면서도 내가 어디서 뭘 하는지 알았다. 제대로 못 팔면 틀림없이 뺨에 불이 나도록 맞을 터였다.

“이게 어디서 난 물건이냐면요.”

나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비가 지랄 맞게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기름먹인 천으로 물건을 싸매고 나니 저 들어갈 자리는 없었습지요. 물건부터 모셔야지 별 수 있나요.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외딴 집이 있더란 말이죠. 주인님이 두드리니, 아 글쎄 웬 아낙이 자다 깨 나오더라고요.”

늙은이의 눈이 빛났다. 지나가던 다른 사람도 ‘아낙’이란 단어에 다가왔다. 나는 사내는 들여 달라 청하고, 아낙은 안 된다고 버티며 수작을 주고받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래서, 들어갔는가, 못 들어갔는가?”

뒤늦게 온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재촉하듯 물었다. 나는 히죽 웃으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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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갔을까요, 못 들어갔을까요? 남편이 이웃 마을 일을 도와주러 간 동안 혼자 남은 아낙이 외간 남자에게 문을 열어 줬겠습니까, 안 열어 줬겠습니까? 열어 줘야 맞을까요, 열어 주지 말아야 맞을까요?”

“아, 그야……!”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입을 뗐다가 주위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들여보내야지! 꼬마도 있는데, 객이 비를 맞게 하는 건 안주인의 도리가 아니지!”

뒷줄에서 누군가 외쳤다.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너도나도 맞는 말이라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죠! 제가 그냥 짐꾼 노릇만 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주인님께서 다정스레 제 어깨를 감싸며 말하셨죠. ‘아들네미가 비를 맞아 고뿔이라도 걸리면, 책임질 거요? 댁이 아들이라도 삼을 거요?’”

나는 사내의 능글맞은 말투를 따라했다.

“그러자 아낙이 말하더군요. ‘어머, 남우세스럽게, 아들을 삼다니요? 아, 댁 아들이 왜 내 아들이 된다요?’, ‘아, 못 될 거 없지!’ 주인님이 그러셨죠.”
사내와 나는 실랑이 끝에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안에서는 어찌 되었는가?”

처음 온 푸른 옷을 입은 늙은이가 물었다.

“저야 모릅죠. 바로 외양간으로 쫓겨나…….”

“무슨 일이 있었느냐…….”

사내가 나섰다. 그는 좌중을 향해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더니, 푸른 옷을 입은 늙은이가 집었던 물건을 들어 올렸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이 물건이 좌판에 깔렸느냐…….”

사람들은 이야기를 듣고자 물건을 샀다.

그날 장이 파하자 사내는 내게 닭 한 마리를 통째로 사주었다. 나는 허겁지겁 먹었다. 닭을 다 먹을 무렵 사내가 뒤를 눈짓했다. 이게 뭐하는 물건이냐 물었던 푸른 옷을 입은 늙은이가 서 있었다. 나는 소맷자락으로 입을 훔치고 그자를 따라갔다.
늙은이는 날 영주가 사는 저택으로 데려가며, 자기는 영주의 집사라고 말했다. 안에 들어가자 하인들이 날 씻기더니 여자 옷을 입혔다. 집사는 영주가 무얼 바라는지 설명했다. 방에 들어가 나는 아낙 역을 했고, 집사는 늙은 영주를 부축해 사내 역을 맡도록 했다. 영주는 사내구실을 하기엔 너무 늙었다. 그런 자들은 대체로 온갖 물건을 사용해 날 괴롭혔다. 나는 푸른 옷을 입은 사내에게 업혀 여관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다시 장에 갔다. 우릴 기다리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물건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했지만, 사람들은 금세 실망해 흩어졌다. 내 입술이 부어터지고, 눈에는 퍼렇게 멍이 든 데다 뺨에 손자국이 고스란히 보인 탓이었다. 이후 사내는 어지간한 값을 부르는 자가 아니면 날 넘기지 않았다.

“약 드세요.”

아이가 어느새 약을 받아 달여 왔다. 아이는 내가 약을 다 마실 때까지 그릇을 받쳐 주었다. 내 손으로 그릇도 못 들 만큼 힘이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이는 이부자리에 데운 돌도 넣어 주었다. 약을 먹고 아이에게 심부름 값을 치르고 다시 누웠다. 하루 종일 자서 그런지 쉬이 잠이 들지 않았다.

그 뒤 사내와 나는 잘해 나갔다. 내가 먼저 온갖 이야기로 사람을 끌면 사내가 물건을 팔았다. 사람들은 특히 사내가 아낙을 희롱한 이야기와 우리가 고생한 이야기를 재밌어했다.
예전에 사내는 일이 잘 안 풀리면 나한테 화풀이를 했다. 언제부턴가 일이 엉망으로 꼬이면,
“나중에 이 이야기 맛깔나게 해 봐라. 사람들이 좋다고 돈주머니를 열 테니…….” 라며 머리를 슥 쓰다듬었다.

사내도 당할 때가 있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만만찮은 사내들이 도처에 있었다. 나는 장에서 사내와 사내 급의 다른 자가 팽팽하게 흥정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사내가 아슬아슬하게 이겼다. 사내는 의기양양해 그자에게 사들인 옥을 들고 장터에 갔다. 비슷비슷한 옥을 파는 장사치들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사내는 시세보다 열 배는 주고 싸구려 옥을 사들였다. 한몫 단단히 잡아 볼 생각으로 가진 돈을 다 털었던 터라 여관에 묵을 돈도 없어 자칭 과부라는 아낙을 유혹했다. 그런데 아뿔싸, 과부가 아니었다. 남편이 하도 계집질을 해 화가 난 부인이 맞불을 놓으려 들었다. 사내가 막 웃통을 벗을 무렵 아낙의 계획대로 남편이 돌아왔다. 사내는 옷은 못 입어도 악착같이 물건은 챙겨 도망가, 호랑이가 나오니 절대 밤에는 넘지 말라는 고개에 들어섰다. 남편과 친구들이 쇠스랑과 낫을 들고 우릴 찾는 통에 마을에서 머물 수가 없었다.

엎친 데 덮친다고 갑작스레 비바람이 몰아쳐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옷자락이 날개처럼 펄럭였다. 이러다 뒤로 날려가는 게 아닐까 겁이 났다. 하늘이 도왔는지 고개 중간에 물레방앗간이 고려장을 당해 버려진 늙은이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안에 들어가 물건을 확인했다. 다행히 중요한 건 모두 챙겨 나왔다. 겨우 안심하고 한숨 돌리려는데 천정이 내려앉았다. 우린 아슬아슬하게 화를 면했다. 나는 기둥 옆에 붙어 비바람을 맞으며 잠이 들었다. 사내가 뒤통수를 내리쳐 깨니 아침이었다.

“잠이 오냐? 무슨 놈이, 어디서든 어떤 상황이든 머리만 대면 처자냐, 그래?”

일어나 짐을 챙겼다. 사내는 단단히 화가 나 무거운 옥은 다 버리고 다른 물건만 챙겨 고개를 넘었다. 고개가 워낙 험해 고개 너머 장에 가자 옥 가격이 다섯 배로 뛰었다.

“여자도 못 건지고, 돈도 날렸죠.”

내가 마무리 짓자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누군가 물었다.

“그래서 어찌했는가?”

“주인님의 화와 아랫도리를 풀어줄 사람이 저밖에 더 있겠습니까.”

나는 짐짓 한숨을 쉬며 허리가 아픈 시늉을 했다. 사람들이 포복절도했다. 사내조차 기가 막혀 날 바라보았다. 그날 사내는 비싼 값을 부르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자기가 날 품었다. 내가 부쩍 키가 자란 이래 날 품는 일이 눈에 띄게 줄었는데 말이다.

“요 녀석, 아주 비상한 재주가 있구나.”

사내는 그날 밤 처음으로 날 범하면서 한 번도 때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는 날 건드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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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장편 [지우전 : 모두 나를 칼이라 했다], [부엉이 소녀 욜란드],
작품집 [원초적 본능 feat. 미소년], [각인]을 출간하고 다수의 공동 작품집에 단편을 수록한 이 인간의 작업 책상에는 컴퓨터, 프린터/스캐너 복합기, 지난 밤 마신 맥주 캔, 고양이가 있다. 네 발 달린 아해가 책상을 오르내리며 키보드를 밟아도 오타는 모두 작가의 책임이라는 게 냉엄한 현실.

오늘도 글을 쓰며 고양이와 키배, 아니 키보드 쟁탈전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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