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정책의 용두사미|최우석<편집국장 대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용두사미라면 심하다 할 것이지만 처음엔 기세 좋게 나가다가 중도에 흐지부지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조조가 계륵이란 군 호를 쓰고 한중에서 철수하듯 은근슬쩍 빠져 버리기 때문에 요란한 구호만 믿고 보따리 못 싼 사람만 손해보게 된다.
그것도 여러 번 당하다 보면 모두들 영악해져서 눈치를 보게 된다. 잘 안 믿고 배후와 저의를 따지는 것이다. 세상을 무척 피로하게 만든다.
실명제만 해도 처음 시작할 땐 정말 기세 등등했다. 경제도 혁명적 개혁의지로 밀어붙이면 된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떤가. 결국 경제논리대로 가고 말았다.
어느 분야고 다 그렇지만 특히 경제는 인과관계가 너무 분명하다. 안 되는 것은 안되게 되어 있다.
지금 실명제는 꼭 계륵과 같이 되어 먹을 수도 버릴 수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금년 세제개혁안에서 지극히 애매 모호하게 해 놓았다.
실명제는 어차피 가야 할 방향이지만 처음 너무 개혁의지가 강조되어 질주하려다 보니 중도좌절을 해 버린 것이다.
실명제를 경제논리대로 차등과세 같은 것으로 순리적으로 추진했더라면 자금도피와 부동산 파동 같은 비싼 대가를 안 치르고도 지금보다 오히려 앞설 수 있었을 것이다.
의욕만 앞섰지 될 일 안 될 일을 못 가리니 그렇게 되는 것이다.
부실기업정리도 용머리가 뱀 꼬리로 변하려 하고 있다.
국제상사를 해체시킬 무렵만 해도 박력이 있었다. 그러나 국제가 무너지며 낸 여파에 놀란 나머지 이젠 아예 손대기조차 겁을 내고 있다.
사실 실명제 같은 것이야 시기가 익기를 기다려 천천히 해도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부실기업 정리는 늦으면 늦을수록 손해가 나는 것이다.
그것은 나라안의 제로·섬게임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 밖으로 국부가 빠지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심각한 사태다. 독이 깨어져 물이 콸콸 새고 있다고 비유할 수 있다.
물론 명분론으로 따지면 정부가 앞장서서 부실기업의 뒤치다꺼리를 할 이유도 없고 모양도 안 좋다.
그러나 부실기업이 왜 생겼으며 이걸 내버려두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할 때 정부가 팔짱끼고 있을 수만은 없다. 어차피 손실이 났고 시간이 갈수록 손실이 커지므로 빨리 매듭을 지어야 한다. 물론 부실에 대한 진상공개와 책임문제는 따져져야 한다. 지금 가장 급한 것은 어떻게 하면 사회적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부실의 구멍을 막느냐 하는 것이다.
사회적 부담 없이 수습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것은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명분론에 매어 있다가는 더 큰 손실을 지게 된다. 따라서 도려낼 것은 도려내고 살릴 것은 살리는 과단성이 필요하다.
국제와 같은 정리는 부실기업의 정리가 아니라 부실의 이전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수습도 요즘은 안되고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좀 서둘더니 금년 들어선 너무 신중해졌다. 『금융자율화니 주거래 은행에서 알아서 하라』는 것인데 막강한 정부가 못하는 것을 힘없는 은행이 무슨 재주로 할 것인가.
말로는 민영화되었다지만 주인 없는 은행인데 몇 천억, 몇 조씩 되는 대 손을 어떻게 낼 것이며 월급쟁이 은행장이 무슨 통뼈라고 국제 같은 파동을 일으키겠는가.
그저 재임 중에 터지지만 않으면 된다는 식으로 모두들 뭉개다 보니 돈은 돈대로 나가면서 일은 일대로 안되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처음 매듭을 지게 한 것도 정부이니 그것을 풀 책임도 정부에 있는 것이다. 그걸 풀어놓은 다음에 금융자율화를 해야지 지금 잔뜩 저질러 놓은 상태에서『알아서 하라』면 책임회피 밖에 안 될 것이다.
아직 사미 까진 안 갔지만 다소 걱정되는 게 안정화 정책이다. 안정정책은 시험 앞두고 밤새움하듯이 사생결단으로 할 것 이 아니라 평소 꾸준히 해야 한다. 체질화해야 하는 것이다.
요즘 유가를 비롯한 원자재 값과 금리가 떨어져 물가안정은 턱 마음놓은 것 같은데 인플레의 불씨는 절대 꺼지지 않는 법이다. 조금만 건조하면 불꽃을 낸다. 작년 하반기부터 엔고로 수출도 늘고 경기도 좋아지고 있는데 그것들이 물가불안의 요인들이다.
엔고란 바로 환율의 인상이기 때문에 전반적인 원가상승을 가져온다.
또 수출증가와 경기호전은 돈이 풀리고 물자가 밖으로 나간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금년 들어 통화증가율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으며 주식·채권 등의 활 황을 범상히 넘겨선 안 된다. 그런데도『자율화니,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안정대책은 징후가 나타난 다음엔 이미 늦은 것이다.
벌써 일본이나 프랑스 같은 덴 안정대책을 쓰기 시작했다.
일본은행은 『지금 일본경제는 전반적으로 젖어 있으나 일부가 너무 건조해 언제 연기가 올라올지 모르므로 바짝 긴장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물가가 3년 연속 떨어졌고 금년도매물가가 작년 비 8·1%라는 전후최대의 하락세를 보이고 있는데도 그렇다. 이런 마음가짐이 안정성장을 가져왔는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작년까지만 해도 국제수지는 어떻게 되든 안정정책만이 살길이라고 외치더니 요즘 물가가 좀 괜찮으니 너무 방심하는 것 같다. 3월말 총 통화증가율이 16·2%까지 갔는데 경제의 활성화를 감안하더라도 좀 심하다. 그런 통화운용은 지속적 안정을 위해 좋지 않은 것이다.
무슨 일을 꾸준히 평상 심으로 하지 못하고 사생결단 하듯 하기 때문에 유연성을 잃고 정책이 용두사미로 되기 쉬운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