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머스크와 다른 길 ‘가이젠’…“한국에 효율적일 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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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본은 장수기업의 천국이다. KOTRA에 따르면 2012년 기준 200년 이상 장수기업이 3937개에 달한다. 전 세계 장수기업 7212개 중 55%가 일본 회사다. 독일이 1805곳, 영국이 467곳이고 한국은 한 곳도 없다. 전문가들은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었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에 유독 장수기업이 많은 이유로 ‘전통을 거스르지 않은 혁신’을 꼽는다.

미국 혁신과 비교되는 일본 혁신
화학섬유 → 플라스틱 → 탄소섬유
90년 된 도레이 끊임없이 변신 중
우버·페북처럼 소수의 한 방 아닌
집단 힘으로 더디지만 꾸준히 개선
비전 제시하는 정부 리더십 한몫
창업 생태계 폐쇄 문화는 문제

1926년 창업한 화학회사 도레이의 역사는 곧 변신의 연속이다. 원래는 화학섬유 ‘레이온’이 주 전공이었다. 하지만 레이온 등 기존 사업이 정점을 찍기 전마다 전공을 바꿨다. 섬유의 도레이→플라스틱의 도레이→탄소섬유·전자정보소재·수처리막 등 첨단 소재의 도레이로 진화한 식이다. 10여 년 전부턴 유니클로와 손잡고 기능성 의류 소재 개발에 뛰어들어 도약의 전기를 마련했다. 일본 산업계에선 변신 와중에도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30년 넘게 탄소섬유를 ‘신성장 동력’ 리스트에 올려놓고 밀어붙인 도레이의 혁신 흐름을 두고 ‘도레이류(流)’라고 부른다.

일본 기업은 도레이처럼 장기적 안목에서 체질을 개선하고 신성장 동력 투자에 집중해 ‘제2의 도약’을 이끌어낸 공통점을 갖고 있다. 제조업 위주 산업구조를 가진 한국이 이들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은 ‘가이젠’(改善·개선)을 향한 뚝심이란 분석이 나온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가이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가이젠은 미국식 혁신(innovation)과 다르다. 말 그대로 ‘개선(improvement)’이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같은 경영자, 탁월한 엔지니어 등 창의적 소수가 혁신을 이끄는 게 아니라 현장 생산직을 포함한 평범한 다수가 내놓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꾸준히 개선하는 방식이다.”

이 수석연구위원은 “개성을 중시하고 대학의 연구 경쟁력이 세계 최강인 미국은 ‘실리콘밸리’식 혁신이 어울리지만 개인보다 조직을 우선시하는 일본·한국 문화에선 꾸준한 개선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형오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우버·페이스북 같은 ‘비즈니스 모델 혁신’보다 도레이·캐논 같은 ‘기술 기반 혁신’이 한국 기업 혁신의 롤모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엔 일본의 혁신 발걸음이 좀 더 빨라졌다. 정부가 드라이브를 걸면서다. 특히 미래 신성장 동력으로 꼽히는 ‘자율주행차’와 ‘로봇’ 분야에서 이런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일본 정부는 최근 도요타·닛산·혼다 등 자동차 업체 6곳과 덴소·파나소닉 같은 부품 회사 6곳이 힘을 합쳐 고정밀 3차원(3D) 지도 등 자율주행차에 필요한 8개 기술 분야에서 협력하도록 했다.

로봇은 일본 정부가 10년 넘게 장기 계획을 갖고 집중해 온 분야다. 혼다 ‘아시모’나 소프트웨어 ‘페퍼’ 같은 인공지능(AI) 로봇이 성과를 내고 있다.

정준명 전 삼성재팬 사장은 “일본의 관료 문화가 옳다고 할 순 없지만 확실한 비전을 제시해 주는 것은 맞다”며 “특히 한국처럼 대기업 중심 경제구조에서 미래가 불투명한 분야에 기업 투자를 이끌어내려면 정부 리더십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창업 생태계가 부실하고 개방성이 떨어지는 점은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지평 수석연구위원은 “일본 창업률(창업 기업이 전체 기업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미국·독일·이스라엘 같은 창업 선진국은 물론 한국에도 못 미친다. 산업의 신진대사가 잘 안 이뤄지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외국인 고용을 꺼려 폐쇄적인 측면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형오 교수는 “일본인은 조심스럽고 개방성이 약하다. 반대로 한국 기업은 도전적이고 글로벌화에 상당히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 기업이 일단 혁신에만 성공한다면 글로벌 시장에서 치고 나갈 가능성이 더 높다”고 말했다.

김기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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