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단군의 자손입니다.”…한국문화 체험에 푹 빠진 고려인 아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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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러시아 연해주 로지나마을에서 열린 마을잔치에서 고려인 아이들이 농협재단 장학생 봉사단과 함께 한국 전통놀이인 투호를 즐기고 있다. [사진 농협재단]

"우리는 단군의 자손입니다."

지난 9일 러시아 프리모르스키주(연해주) 우수리스크 인근의 로지나(고향)마을. 곰과 호랑이 탈을 쓴 소년ㆍ소녀들이 마을 어른들을 관객으로 고조선 건국신화를 주제로 한 연극을 선보였다. 곰이 100일간 마늘과 쑥을 먹은 뒤 사람이 되는 장면에선 여기저기서 박수가 나왔다. 아이들은 로지나마을에 정착한 고려인의 자제 또는 손주다. 연극은 농협재단 장학생봉사단이 이날 열린 마을잔치를 위해 준비한 행사 중 하나다.

농협재단(이사장 김병원)과 재단 장학생 봉사단이 처음 마을에 왔을 때만 해도 아이들은 선뜻 다가서지 않았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데다 시골 아이 특유의 쑥스러움까지 더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기차기와 투호(병에 화살을 던져 넣는 놀이) 같은 전통놀이 체험을 하자 금세 웃음을 띄며 대학생들과 친해졌다.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이 이들을 하나로 묶었다. 봉사단 학생 대표인 김도연(23, 성균관대 경영학과)씨는 “아이들이 동네 형, 누나에게 하듯 장난을 걸어오니 봉사활동한 보람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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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재단 소속 장학생 봉사단이 9일 러시아 연해주의 고려인 정착촌인 로지나마을에서 마을잔치를 연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농협재단]

장학생 봉사단은 몇 달간 연습한 K팝댄스ㆍ태권무ㆍ난타공연ㆍ사물놀이도 차례로 선보였다. 사물놀이가 끝나자 신이 난 아이들이 뛰어나와 대학생들과 손을 잡고 강강수월래를 돌며 행사를 마쳤다. 농협재단은 마을에 옷 200벌과 노래방 기계 두 대를 선물했다. 로지나마을 주민 대표인 김니나(71)씨는 “노래방 기계는 한국가요를 맘껏 부를 수 있어 남녀노소 모두 좋아하는 선물”이라고 말했다.

로지나마을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중앙아시아(우즈베키스탄ㆍ카자흐스탄ㆍ타지키스탄ㆍ키르기스스탄)에서 재이주한 고려인의 정착촌 중 하나다. 연해주 전체 고려인 5만명 중 3만명이 중앙아시아에서 왔다. 스탈린 시대인 1937년 6000㎞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한 지 54년만의 귀향이었다. 소련 붕괴 이후 커진 민족주의 흐름 속에 현지인의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이들의 사정을 전해들은 대한주택건설협회가 2000년 33개 주택을 지어 우정마을을 만들었고, 2007년 민간단체인 연해주 동북아평화기금이 바로 옆에 16개 주택을 지어 로지나마을을 만들었다.

이 단체는 방과 후 학교인 로지나서당을 만들어 우정마을과 로지나마을의 고려인 초등학생ㆍ중학생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 김완배(서울대 농경제학과 교수) 농협재단 이사는 “연해주는 고려인의 역사가 담긴 곳이자 농산물과 지하자원의 보고”라며 “연해주 고려인마을과의 문화 소통이 한국과 연해주의 경제 교류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우수리스크(러시아)=이태경 기자 uni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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