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시라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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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3·16 프랑스 총선 결과는 우파 연합의 신승이었다.
좌파인 「프랑스와·미테랑」 대통령은 어쩔수 없이 좌우 동거 내각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동거는 프랑스어로 「코아비타숑」이다. 영어로는「코해비트」(cohab-it).
그 동거 상대로 「미테랑」이 선택한 인물이 「자크·시라크」 현 파리 시장이다.
1백90cm의 장신에 안경을 낀 「시라크」가 얼핏 「드골」과 「조르지·퐁피두」 등 과거 프랑스 두 장신 대통령의 풍모를 느끼게 하는게 인상적이다.
아닌게 아니라 「시라크」는 우파 연합 중에도 드골파에 속하고 「퐁피두」 대통령 시대엔 그의 심복이었다.
그런 경력으로 보아도 그는 갈데 없는 우파 정치가다.
말쑥하고 점잖은 옷차림과 세련된 매너로 해서 전형적인 프랑스 멋장이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실제 32년 11월29일 파리의 실업가 가문에서 태어나 파리 토박이로 자란 뒤 명문 국립 행정 학원 (ENA)을 나온 수재니까 갈데 없는 보수파다.
하지만 과거 경력을 들춰보면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50년대 고교 재학 시절엔 공산당이 추진하는 핵무기 전면 금지 호소문에 서명, 경찰 명단에는 엄연히 극좌파로 기재돼 있다.
또 미국 하버드대에 잠깐 유학했을 때는 학자금을 벌기 위해 식당에서 접시 닦기도 했다.
그의 관계 진출은 ENA출신의 야망을 실현하려는 첫 걸음이었다.
59년 알제리 문제국에 들어간 뒤 그가 입신한 것은 「퐁피두」 당시 수상의 개인 비서가 되면서부터 였다.
재무성과 사회 문제성 차관이 된 것도 「퐁피두」의 도움이었다.
그건 「퐁피두」의 평가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퐁피두」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그를 심복으로 인정했고 그를 「불도저」라고 불렀다.
「불도서」답게 그는 74년의 대통령 선거에선 우파 연합의 단일 후보 옹립을 위해 자파인「샤방-델마스」전 수상 대신 독립 공화파인 「지스카르·데스탱」 지지를 주동, 관철시켰다. 그덕에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 때는 41세로 최연소 수상이 되었었다.
하지만 그때의 동거는 2년 밖에 지속하지 못했고 「시라크」는 77년 파리 시장이 되었었다.
지금 그는 좌파 「미테랑」의 동거 제의를 받고 있다. 정치적 야망과 강인한 투지를 가진 사나이가 그걸 거부할 리는 없다.
그가 수상이 되면 「레이건 식 경제 개혁」을 해야 한다는 동지들의 성화를 받게 된다.
사회당 정부의 국유화 정책을 완화해 기업 확장을 유도하고 실업을 해소하며 정부 예산을 축소하라는 아우성이다.
88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무조건 그런 강경책을 쓸 수는 없다.
야망을 가진 정치가가 「미테랑」을 어떻게 다룰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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