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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돌아올줄 알았다"|베를린서 만났을때 "낌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김지미씨가 한달전 영화제서 본 최은희-신상옥부부>
『은희언니는 둘이서 만난 2시간동안 머리가 푹 젖도록 진땀을 흘렸어요. 또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 초조한 표정으로 안경을 썼다 벗었다하더니「벌써 헤어져야 하느냐. 이대로 영원히 헤어질수는 없다」며 단호히 말해 뭔가 심상치 않은 변화를 겪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지난 2월14일 하오 7시 베를린「인터콘티넨틀 호텔」1층 리셉션장에서 열린 베를린영화제 오프닝파티에서 최은희·신상옥부부를 직접 만났던 배우 김지미씨는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최씨가 당시에 이미 탈출할 것을 결심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김씨는 이날 파티에서 최씨와 만나 대화를 나눈 뒤에도 귀국할 때까지 호텔에서 세차례 전화를 통해 못다한 얘기를 나눴다.
김씨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길소뜸』 (임권택감독) 이 본선에 진출, 이날 전야제행사에 우리측 대표로 초청 받아「지미필름」사장인 제부 진성만(45)씨와 함께 참석했다.
임감독은 현지도착이 늦어져 참석치 못했다.
김씨는 이날 꽃무늬가 든 분홍색 한복차림이었다.
베를린영화제 당국이 주최한 파티에는 참가국의 영화인들만이 초청돼 참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최·신부부가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편안하고 자유스런 분위기에서 김씨와 마음껏 대화를 나눌수 있었다는 것.
그래도 최씨는「함께 한국으로 가자」는 말에는 주변만 살필 뿐 대답을 회피했다.
『파티장에 들어서니 먼저 와있던 신감독이 저를 보고는 달려와 껴안고「반갑다」며 인사를 하더군요. 그리고는 은희언니를 제게 데려왔어요.』
김씨에게 달려오듯 다가온 최씨는 김씨를 보자마자 『너 지미 아니냐. 정말 반갑다』며 왈칵 껴안고는 가족들의 안부와 한국영화계 실정에 대해 물어왔다. 『먼저 언니 (최경헌) 와 동생(최경옥), 그리고 아이들이 잘있느냐. 언니는 혹시 돌아가시지 않았느냐고 묻더군요』
이후 2시간동안 김씨와 최씨의 대화는 주로 최씨가 묻고 김씨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이어져갔다.
『은희언니는 얘기를 나누면서 줄곧 제 손을 불잡고 이따금 부둥켜안거나 볼을 비비면서 울고 있었어요.』
김씨는 최씨와의 대화 가운데 최씨가『내 모든 속상하는 일 잊으려니 견디기 어렵다. 오직 영화 만드는 일로 괴로움을 잊으려한다』는등 뭔가 북한실정에 적응하지 못하고 편치 못한 듯한 강력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
잠시 얘기를 나눴던 신씨도『김일성 찬양하는 영화만 만들수는 없다』는등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씨는『솔직히 말해 우리는 김정일에게 4백만∼5백만달러가량 빚을 지고있다』며 한숨을 쉬었고 김씨가『그정도 빚은 내가 갚아드릴께요』 라고 웃으면서 말하자『언제 그렇게 돈을 많이 벌었어?』하고 놀라는 표정으로 되물었으나 더이상 돈 얘기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빚은 김정일이 부다페스트와 빈에 신필름 영화 제작소를 차려주면서 씌운「올가미」인것 같다는 풀이.
이빚도 두사람의 탈출에 한동기가 된것으로 추정되고있다.
최·신부부 모두 가족과 영화계에 대해 많은 것을 물어올 뿐 북한쪽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두사람 모두 상당히 여위어있더군요. 은희언니는 검은색 투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인상적인 것은 납북 당시에 썼던 안경을 그때까지도 계속 쓰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이들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내가 요즘 「칭기즈칸」을 찍고 있는데 지미씨가 출연해 주었으면 좋겠다』(신), 『출연료만 두둑히 준다면 못할것도 없다』(김) 는등 스스럼없는 농담도 오갔고 나란히 기념사진도 찍었다.
『저는 헤어지기 섭섭해 계속 언니를 붙들고 있었는데 일본인영화평론가 「구사가베」 (초벽구사낭) 가 다가와 언니에게 뭔가 귀엣말을 하니「어디 들를데가 있으니 나 먼저 가봐야겠다」며 서둘러 나가더군요. 언니는「또 보자」며 다시 한번 저를 껴안고 흐느꼈어요.』
최씨는 헤어질때 『어디 묵고 있느냐』고 물어와 김씨가 호텔 (시티 캐슬 호텔) 의 방번호(307호실) 를 가르쳐주었더니 26일 베를린을 떠날 때까지 세차례 전화를 걸어왔다.
최씨는 20일 오전10시쯤 마지막 전화에서는 한층 풀이죽은 목소리로『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다』며 침통하게 흐느꼈다는 것이다.
최·신부부는 이날 김씨와 헤어진후 19일하오7시 조팔라스트영화관에서 열린『길소뜸』시사회에 꽃다발을 들고 나타났다. 그러나 정작 김씨는 몸살로 시사회에 참석치 못해 만나지 못했다.
이들 부부 뒤에는 북괴요원들로 보이는 청년 7∼8명도 있었다는 것.
최씨는 영화가 끝난후 무대까지 올라가 임감독에게『차분하게 영화 잘 만들었다』고 칭찬하고 꽃다발을 전해주고 돌아갔다.
김씨는 최·신부부에게 몇차례『함께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권유했고 그럴 때마다 그들은 상당히 흔들리는것 같았다는 것.
김씨는 이들과 만난후 26일 베를린을 떠나 파리를 거쳐 귀국했다. <이창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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