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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 유어 에퍼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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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당신 자신의 노력으로』-, 「대처」 수상이 좋아하는 말이다. 영어로는 『바이 유어 온 에퍼트』(by your own effort) 라고 한다.
이런 일화가 있었다. 82년 말 영국 정부가 지원하는 한 기업이 해저 케이블 설치선을 한국에 주문했다. 야당인 노동당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국내 실업자와 불황을 내버려두고 무슨 짓이냐고 나무랐다.
『영국 상품은 세계 최고의 품질과 가장 합리적인 가격으로 경쟁해 이겨야 한다. 바이 유어 온 에퍼트!』.
바로 「철의 여인」(아이언 레이디)이란 별명에 걸맞은 대응이다. 원래 이 별명은 소련의 프라우다지가 붙여주었다. 정작 「철의 여인」 이미지가 소련쪽에 유감없이 비추어진 것은 웃지 못할 아이러니다.
1982년 「브레즈네프」가 죽었을 때 「대처」는 런던 주재 소련대사관에 설치된 빈소를 찾지 않았다. 그는 소련에 그 정도의 호의에도 인색했다.
2백 65년 영국 의회사상 43명의 수상이 탄생했지만 여 수상은 「대처」가 처음이다. 1979년 총선 승리 후 세계의 매스컴들이 그 사실을 떠들어대자 「대처」는 단호하게 말했다.
『정치가에게 남성, 여성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구별만이 있을 뿐이다.』 「대처」는 밖으로는 포클랜드 전쟁의 승리자로, 안으로는 영국 병의 치유자로 철인의 모습을 빈틈없이 보여주었다.
영국 병이라면 실업자와 연 25%나 되던 인플레와 파운드화의 폭락-, 3중고가 겹친 이른바 「트리-레머」 경제를 두고 하는 말이다.
「대처」는 그 원인을 「지나친 평등주의」에 의한 「게으른 사람들의 천국」에서 찾았다. 따라서 유일한 치료법은 철저한 경쟁원리의 존중. 「대처」는 1979년 수상직에 도전하는 선거에서도 유권자들에게 표를 구걸하지 않았다.
『「국가의 책임」이라는 말은 이제 그만하고,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책임에서부터 모든 일을 시작합시다』
「대처」는 수상 7년 동안 『임금을 올리라』는 광산 노동자, 공장 근로자, 공무원들의 요구와 폭동에 직면했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바이 유어 온 에퍼트』-, 이것만이 영국의 자존심을 회복시키는 길이라고 거듭 역설했다. 그때마다 매스컴들은 「대처 정권」의 붕괴를 예고했지만 그는 여전히 건재하다.
잡화상 겸 야채가게의 2녀로 태어나 장학금으로 옥스퍼드대학에 진학해 화학과 법률을 전공, 변호사 자격을 따고 그 이듬해엔 쌍동이 아기까지 분만. 하루 잠자는 시간은 3시간. 그래도 바쁜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바로 그 「철의 여수상」이 5월 신록에 한국을 방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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