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군반기 배경과 경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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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0년 「마르코스」 정권에 대한모반은 역설적으로 정귄의 유지기반이 돼왔던 군부내에시 일어났다.
「엔릴레」· 「라모스」 의 반란은 40년 필리핀공화국역사상 정치에개입한석이 없던 군부가 주동이 됐다는 점과「마르코스」대통령의 군부통수계통인 「마르코스」-「엔릴레」-「베르」라인의 「엔릴레」 가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사대는 심각했었다.
특히 이번 반난은 필리핀사태 수습을 위해 「레이건」 미대통령의 특사로 파견된「필림·하비브」 가 필리핀내에서 모종의「공작」 을 마치고 미국으로 떠난지 1시간후에 발생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필리핀외기가 시작되면서 「레이건」 행정부는 사태를 진정시키는데 필리핀군부가 중심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있었고,미국관리둘은 그동안「마르코슨 대통령을 지지하는부패세력을 분쇄하려는 군부내개혁파를 고무해왔다.
미국은 지난 1959년 「막사이사이」 가 대통령에 당선될 당시 친미파인 「막사이사이」 가낙선될 때에 대비해 7함대소속 함정들을 마닐라만에 짐결시켜 놓고 군부쿠데타를 기도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7함대소속 미드웨이호·블루리지호등 주력함정및잠수함·전투함과 함께 2만5천명의 병력을 선거직전부터 마닐라만에 대기시켜 놓고있다.또 수비크만 해군기지와 클라크공군기지에 주둔하는 1만6천명의 미군병력을 비상경계하에대기시켜 놓았다.
22일 반란은 「마르코스」 대통령이 자신의 암살을 기도했다는 이유로 「엔릴레」국방상과 「라모스」 참모총장서리를 체포하러던 것이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 그러나 근본적인 동기는 그들이 반난직후 공동기자회건에서 『투표를 통해 표시된 국민의 주귄 의지를 존중하는 것이우리의 의무』 라고 밝혔다. 또「라모스」 는 군부의 중립을 주장하면서 선거부정이 과거처럼자행될 경우 좌시하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말해왔다.
그는 이번 선거에서 자신이「마르코스」 대통령의 친척임에도 불구, 『군인은 국가와 현법에 충실해야 된다』 며 군의중립을 주장해왔다.
그러면 「엔릴레」 와 「라모스」는 왜「마르코스」대통령을 제거하려 했는가. 우선 「엔릴레」국방상의 경우는 과거에 자신이「마르코스」로부터 받던 전폭적인 신임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한 동기가 될수 있다.
지난 72년 「마르코스」 대통령에 의해 계엄이 선포될 당시계엄군의 총수로서 요인체포·투옥을 앞장서서 했던「엔릴레」는 또 「이멜다」여사와 함께 가장 강력한「마르코스」의 후계자였다.
그러디중 83년8월 반정부지도자 「아키노」 전상원의원이 마닐라공항에서 살해된후 「마르코스」 대통령이 재출마로 뜻을 바꾸자 「엔릴레」 의 야망은 좌절됐다.
이어 각료중에서 서열1위였던 국방상으로서 자신의 권한이 서서히 「베르」 참모총장으로이양되면서 「엔릴레」 는 무력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81년 「마르코스」 부부가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할 당시 유고시의 비상사태를 장악할수 있는 대권을 「베르」 에게 맡기고 떠났고이 점이 결정적으로 「엔릴레」 의 약화를 시사하는 것이었다.
이같은 정황으로 미뤄 「엔릴레」 가 반난을 주도한것은 납득 할만하나 「라모스」 참모총장서리가 가담한 것은 의문의 여지가 남는다. 「라모스」 는 「마르코스」 의 외육촌이며 곧 참모총장에 기용될 인물이다.
그가 군정군운동 (RAM) 의리더이기는 하나 반 「마르코스」를 들고 나온 적은 없었다.
지난 81년에 정년을 맞은 그를「마르코스」 는 무제한 근무연장으로 군에 계속 남아있게했다. 「라모스」 는 미국의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일리노이대에서 공학석사학위를 받은 친미파장군이다. 미국은 선거전에 군부개편을 요구하면서 「베르」 대신 「라모스」를 참모층장자리에 앉혀 군부개혁을 주도해야한다고「마르코스」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했었다.
만약 미국이 필리핀군부가 사태를 장악하도록 원했었다면 「라모스」슨를 통해서 그러한「의사표시」 를 했을 가능성이 가강그다.그리고 반난직후 기자회견에서 「엔릴레」 와 「라모슨 가「코라손」 여사를 지지하고 나선 것을 볼때 「코라손」 여사도사전에 미국의 의사표시에 포함됐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반군을 즉각 지지하고 나선 가톨릭지도자 「하이메· 신」 추기경도 포함돼있을 가능성이있다. 가톨릭은 그동안 특정인을 지지하지 않고 「마르코스」 만을 비난하면서 결과적으로 「코라손」을 지지하는 태드를 취해 았다.
벌써 정부군측에서는 이탈자가 속출하고 있다. 「라모스」가 90%의 군부지지를 받고있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전국방상및 퇴역장성 15명이 22일 반군지지를 선언하고 나섰다.
또 23일에는 수비크만 미해군기지가 있는 올롱가포지역의 핵심 수도방위사렴부 사렁관이 반군지지를 밝혔으며 안겔레스지역의 사령관도 가세했다.
그런가하면 가톨릭방송인 라디오베리타스가 시시각각으로 전해주는 반난소식을 듣고 반군캠프로 몰려드는 시민들이 점차 늘어갔다.
시민들의 숫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급속히 불어나고있으며 23일에는 정부군이 탱그 5대와무장병력을 대운 트럭으로 반군캠프에 진입하러다 시민들의 육탄저지로 퇴각하고 말았다.
체신청장관이 반 「마르코스」를 선언하는가하면 로스앤젤레스와 호놀룰루의 총영사및 영사관직원둘이 반군지지를 선언하고 나섰다. 이밖에도 정부관료및 군병력의 이탈이 속출했다.
그러나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이 안될 경우 무력 충돌은불가피 할 뻔했다. 군부요소요소에 앉아 있는 「마르코스」대통령의 친척들로 구성된 「마르코스」 추종세력과 반군추종세력간에 무력충돌이 발생할 위험도 있었다.<김상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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