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14) 제84화 올림픽반세기(63)-메달의 산실 태릉선수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태릉선수촌-.
66년6윌 건립된 이래 20년동안 수많은 스타를 낳고 길러온 한국스포츠의 요람이다.
현재의 공식명칭은 태릉훈련원. 세계정상을 위한 극기와 땀의 현장이다.
8만여평의 녹지위에 승리관·개선관·월계관등 전문 종목별로 배정된 각종 체육관시설과 전진관·영광의 집·올림픽의 집등 숙소, 축구장·테니스 코트·실내수영장·실내외링크등을 완벽히 갖추고 있으며 연간 운영예산만도 1백억원에 이르는 매머드 「메달제련소」 로 위치를 굳혔지만 개촌당시만 해도 규모와 시설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서울도봉구공릉동산223번지 문화재관리국 부지 l만평에 들어선 것은 본부건물 1동·선수숙소 2동·목욕탕 1동 뿐이었으니 그야말로 단순한 합숙소 구실밖에 할수 없었다.
그러나 67∼71년 선수촌 확장 5개년 계획을 필두로 새로운 시설물들이 하나씩 자리를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한때는 선수들이 선수촌을 무단으로 이탈, 인근 태릉네거리의 가게에서 술을 사마시고 싸움을 하는 일도 종종 있었고 선수촌내에서도 위계질서가 잡히지 않아 불상사도 가끔 일어났다.
사무총장이었던 나는 자연히 선수촌에서 지낼 때가 많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선수촌 일대는 단물이 많기로 이름난 먹골배의 산지였다.
가끔 허허벌판길을 걸어 배밭에서 배를 한아름씩 안고 들어와 파티를 벌이던 것은 그 와중에서도 유쾌한 추억이다.
나는 76년9월 제8대 선수촌장으로 부임한 이래 현재까지 선수들과 호흡을 같이하며 지내왔다.
「호랑이」「염라대왕」「시아버지」 등 선수·감독들이 지어준 애칭 (?) 가운데 「터줏대감」이 끼여있는 것은 내가 역대 촌장들과는 달리 장수를 누렸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부임한 이후부터 달라진 것이 여러가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침식제공의 단순한 역할만 맡아왔던 선수촌이 훈련내용에 관여하게된 것이다.
물론 훈련계획을 세우거나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은 각 경기단체임원및 감독·코치의 고유권한이지만 이의 적합성 여부를 검토하거나 차질없이 수행하도록 감독하게 됐다. 또 하나는 체력강화훈련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된 것이다.
국제경기의 패인으로 약방의 감초처럼 끼여있는 것이 「체력의 열세」 이면서도 정작 체력훈련은 등한시 해왔던 것이다.
나는 「선체력 후기술」을 지나칠만큼 강조, 체력훈련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도록 강요하다시피했다.
매주 토요일 하오 실시하는 10㎞ 불암산 크로스 컨트리도 이러한 훈련프로그램의 하나로마련한 것이다.
지금 훈련원내에는 선수회관 신축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9억4천여만원의 예산을 들여 옛 스포츠과학연구소가 들어있던 본관과 운동장사이에 음악감상실·영화관·도서실및 휴게실·이-미용실등 선수들 복지를 위해 사용할 건물을 짓고 있는 것이다.
운동장과 수도시설조차 변변히 갖추지 못했던 초창기에 비하면 요사이 선수들은 참으로 불편없이 지내는 셈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