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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임대주택이라도 제발 손자에게…” 유언 남긴 85세 할머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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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기초생활수급자인 강모(70)씨는 서울 종로구의 43㎡(13평)짜리 임대주택에서 20여 년간 홀로 살았다. 이혼 뒤 연락이 끊긴 남편과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은 7년 전 교통사고로 숨졌다. 며느리와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애들한테 해준 것 하나 없어 미안”
쓰던 물건 노인복지회관에 기부도
저소득층도 사후 재산 분쟁 많아
상속 관련 상담 4년 새 5배 늘어
서울시, 무료로 유언장 작성 지원

‘내가 못나서 애들한테 해준 것 하나 없어요. 나 죽으면 이 몸하고 쓰던 물건들이라도 나처럼 어려운 사람을 위해 쓰였으면 좋겠어요’. 강씨가 서울시 산하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이하 공익법센터)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유언장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그는 1일 “나 혼자 죽으면 이 물건들을 어쩌나 하는 걱정을 했는데 이제는 속이 후련하다”고 말했다. 유언장에 따라 강씨 사후에 TV와 냉장고는 노인복지회관에 기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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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소득층 노인들이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의 도움을 받아 자필로 작성한 유언장. [사진 공익법센터]

강씨처럼 자신이 사망한 뒤 남을 물건이나 재산의 처분 때문에 고민하는 노인이 많다. 지난해부터 저소득층 노인 유언장 작성을 도와온 공익법센터에 따르면 저소득층 노인들의 상속 관련 상담 건수는 2012년 46건에서 지난해 228건으로 늘었다. 상담을 원한 노인 중에는 홀로 노년을 보내는 이가 많았다. 이는 서울시가 유언장 작성을 지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가영 공익법센터 변호사는 “가난한 생을 살았다고 해서 재산 관련 분쟁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빈곤에 시달리는 노인의 자녀도 가난한 경우가 많아 임대아파트 임차권을 둘러싼 분쟁이 종종 생긴다”고 말했다.

지난해 지병으로 사망한 윤모(당시 85세)씨는 중학교 3학년인 손자와 둘이 서울 노원구의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살았다. 아들 부부는 손자가 2세 때 이혼했고 아들은 2007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 슬하에 딸 넷이 더 있었지만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다. 그러던 중 지난해 4월 할머니는 사경을 헤매게 됐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그는 자신이 죽더라도 미성년자인 손자가 계속 자신의 아파트에 살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이를 위해선 상속권자인 딸들이 “임차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증명을 관리사무소에 제출해야 했다. 하지만 어렵게 연락이 닿은 딸들은 “(조카를 위해) 임차권을 양보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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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윤씨는 산소호흡기를 쓴 채 중환자실에서 유언장을 남겼다. 유언을 통해 손자를 상속자로 지정했다. 그 덕분에 윤씨 손자는 영구임대아파트 임차권과 보증금 260여만원을 상속받게 됐다. 할머니는 유언장을 작성한 지 한 달 뒤 숨을 거뒀다.

유언장 작성 방식은 다양하다. 윤씨처럼 문맹이거나 말을 못하는 노인들을 위해 자필증서 외에도 녹음·구수증서(유언을 말하면 곁에 있는 사회복지사가 이를 받아 적어 기록을 남기는 방식) 등 다양한 방식으로 유언장이 만들어진다.서울시의 유언장 작성 지원은 재산 분쟁을 예방하는 효과도 낸다. 지적 장애가 있는 딸과 생활하던 장모(84)씨는 자신이 생을 마감한 뒤 홀로 남게 될 딸이 걱정이었다. 전 재산인 주택 전세금 4000만원을 딸에게 물려주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다. 이 사정을 들은 공익법센터는 법적 절차를 거쳐 딸이 상속 대상자로 지정되도록 도왔다.

조한대·서준석 기자 cho.hand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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