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코룸 하이웨이를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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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이용범교수<동국대·동양사>역사기행
혜초의 『왕오천축국부』에 「울지인나」 로 소개되고있는 스와트분지를 향해 칠라스를 떠난 것은 다음날인 12월21일 상오7시30분.
베샴에서 카라고룸 하이웨이를 벗어나 지도에도 잘 그려져있지않은 산길을 90km나 달려 2천1백m가 넘는 상가리고개를 넘어가야했다.
우리는 우여곡절끝에 카라코룸하이웨이를 빠져나와 오른쪽으로 차머리를 돌려 스와트로 빠지는길로 접어들었다.
좁은 길이였지만 포장이 잘돼있고 지나는 차도 드물어 예상보다 빠른 속도를 낼수 있었다.
우리가 스와트 강변의 예약된 사이두-사리프시의 숙소에 도착한것은 오후7시가 훨씬 지난 뒤였다. 사이두-사리프시는 4세기말∼5세기초 스와트계곡을 여행한 중국의 구법승 법현의 『불국기』에 「오갈국」으로 소개된 우쟈나의 수도 미르고라시에서 스와트강을 사이에 두고 영국이 통치할때 그들이 건설한 신시가지다.

<곳곳에 불교유적 현장·혜초도 기록>
시가 커짐에따라 여행자의 눈에 미르고라시와는 경계까지도 분명치 않게 보였으며 고색창연한 고도 미르고라시에 비해 잘 정돈된 시가지는 밝은 전원도시의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상업도시 미르고라와는 풍취부터 달랐다.
오갈국은『불국기』에 불교사찰이 5백개나 된다는 대단한 불교국으로 기록돼 있을뿐 아니라 6세기에 이곳을 찾았던 중국의 송운·혜생 또한 여기가 철저한 불교국이며 기후와 토질이 좋아 2년간이나 이곳에 머물렀다고 여행기에 적고있다.
특히 7세기에 이곳을 들렀던 중국최대의 고승이면서도 세계적인 대여행가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이곳을 「오벌나국」으로 소개, 당시 불교는 다소 쇠퇴했으나 전성기의 「1천4백가람」 과 승려 「1만8천」이었던 여세를 이어받아 여전히 성황을 누렸던 것으로 적고 있다. 우리의 혜초 또한 「오갈국」 「울지인나」란 이름으로 이곳의 불교교세를 기록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불교유적이 얼마나 많은지를 짐작할수있다.
22일 아침7시부터 우리는 활동을 개시했다. 우선 불적조사를 뒤로 미루고 먼저 미르고라시에서 서북으로 약60km떨어진 디르와 치트랄가도 쪽으로 차를 몰았다. 거기엔 내나름대로의 까닭이 있었다.
치트랄은 혜초의 『왕오천축국부』에 불교를 독신하는 「구위국」의 수도로 알려져 있을뿐 아니라 우리의 고선지장군이 일생의 절정기인 천보9재 (750년) 그 말굽을 힌두쿠시산맥까지 뻗쳐 짓밟았던 갈사국또한 치트랄과 접한 힌두쿠시산중의 소국이었기에 일찍부터 이 가도에대해 깊은 관심을 갖지 않을수 없었다. 혹시 사이두-사리프와 미르고라시에서 옛오갈국불적조사에 시간이 걸려 이 지역을 가보지못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돼서 불교미술사를 전공하는 조사단원들을 설득시켜 먼저 그곳을 답사키로 한것이다.
아침일찍 차는 스와트강을 건너 미르고라시의 교외로 빠져나갔다. 오래된 가로수길을 서북으로 계속 달리다가 페샤워르의 갈림길에서 스와트강과 다시 마주쳤다.
안내자 「무하메드·칸」씨는 「알렉산더」대왕의 진격로가 이 길이였으며 그후 많은 이민족이 대부분 이 길을 거쳐 인도대륙으로 침입해 들어왔다고 말한다.

<이민족의 침입루트 알랙산더왕도 진격>
혜초가 이 길을 걸어서 치트랄까지 간것은 『왕오천축국부』에 적혀있는 나라이름의 순서로 보아 거의 의심할바 없으나 동시에 고선지장군의 진격로로 보는데는 약간 의심스러운 점도 없지않다.
그것은 기르기트에서 서남방향으로 치트랄로 나오는 또 다른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고선지장군의 진격로로 보려 하는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즉 기르기트에서 치트랄로의 길은 좁고 험악한 산길이어서 군을 움직이는데 매우 불리한 반면 우리조사단이 거쳐왔듯 기르기트→베샴→상가리→사이두-사리프를 경유해 이스와트분지로 들어오는 길은 대군을 움직이는데 큰 불편이 없었을뿐더러 거리 또한 큰 차이가 없기때문이다.
『모든 생물은 저항물이 없는길을 골라 앞으로 나간다』는 생물학에서의 철칙이 인정된다면 강훈련을 위한 군사행동이 아니라 생명을 건 싸움에서 작전상 가장 유리한 진격로를 택해 간다는 이치를 고선지장군인들 모를리 없었을것이다. 이런점에서 기르기트에서 우리 조사단이 거쳐온 그 길이 바로 고선지장군의 갈사국 진격로 일것이라고 믿어보는것도 큰 잘못은 아닐것같다.
페샤워르와의 갈림길에서 차머리를 서북으로 돌리자 우리눈앞에 전개된 주변의 풍치는 뜸뜸이 펼쳐진 오린지과수원과 완만한 평원사이를 유유히 흘러내리는 스와트강, 그리고 그 건너편으로 손에 잡힐듯 둘러싼 힌두쿠시의 연봉들, 어느모로 보나 아프가니스탄과의 접경지대라는 사실을 잊게하는 평화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내왕하는 사람중엔 적지않이 권총같은 무기를 휴대하고 있어 불안감을 줬다.
『무기매매가 허용된데다 지니고있는 무기의 종류가 그 신분을 알리는 물증이 된다』고 이지역사정에 밝은 서경수교수가 귀뜀해줬다.
스와트강변을 따라 달리던 차가 철교를 건너려는 순간 「칸」씨가 다리왼쪽 산위를 가리켰다.『저기보시오. 산꼭대기의 저 조그마한 건물이 바로 영국의 「처칠」수상이 1897년 이곳에서 사범으로 근무할때 보초근무하던 초소입니다. 지금도 기념삼아 보존하고 있지요』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선 너머나무 한그루없는 힌두쿠시산계의 바위산이 마치 해골을 늘어놓은듯 길게 뻗쳐 산꼭대기에 자리잡고있었다. 철교를 건너자 마을이 나왔다. 잡화상·식료품상등이 있고 사람의 내왕도 제법 많았다.
차가 디르박물관 앞에 멈추자 사람들은 무슨 큰 구경거리라도 생긴듯 호기심에 찬 눈초리로 우리 차를 둘러쌌다. 10살도 안돼보이는 어린아이가 입에서 담배연기를 뿜어내면서 손을 내밀어 담배 좀 달라고 한다.

<직물에 선명한라벨「메이드 인 콧리아」>
규모는 작지만 그리스조각기법이 뚜렷한 불교유물로 가득 찬 디르박물관을 훑어본 나는 혼자서 안내인을 앞세워 치트랄가도로 차를 몰았다.
이지역의 겨울여행은 아주 불편하다는 여행안내서의 글과 『대장간에서 사제권총을 만드는 것을 보았는데 그 정교함에 소름이 끼치더라』는 정병조교수의 귀뜀에 위축되면서도 고선지장군과 혜초가 지나갔던 그 길을 한번은 꼭 밟아봐야겠다는 강렬한 욕망을 억누를 수 없었다.
서쪽으로 힌두쿠시를 바라보며 잘 포장된 6차선 도로를 북으로 달렸다. 오가는 차도 뜸하여 빠른 속도를 낼수 있었다. 한 30km쯤 갔을 때였다. 박물관측에서 안내를 하도록 딸려 보낸 노인이 갑자기 운전기사에게 차머리를 돌리게 하고 큰 소리로 무엇인가 외쳤다. 표준어인 우르두어밖에 모르는 운전기사가 이곳방언인 푸쇼토어로 지껄이는 노인안내원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왔던 길로 되돌아 차를 몰았다. 참으로 순간적인 일이었다. 누가 앞길을 막은것 같았다. 20∼30km만 더가면 되는것을…하는 아쉬움과 함께 심한 좌절감을 맛보았다.
디르박물관에서 다른 단원들과. 합류, 미르고라시를 향해 출발한것은 이럭 저럭 상오11시가 넘을 무렵이었다.
몇군데의 불교유적을 조사하고 미르그라시에 도착하니 오후1시. 우리는 건물은 낡았지만 인파로 붐비는 미르고라의 상업지구를 찾았다. 상가를 구경하다가 뜻하지않은 곳에서 참으로 반가운 것을 찾아냈다.
직물가게에서였다. 색채와 문양이 너무도 특이하고 아름다와 이곳의 특산이 아닌가 하고 뒤적거려 보았더니 「메이드 인 코리아」라는 상표가 붙어 있지 않은가.
자비의 세계를 구현하는 지혜의 뿌리를 찾기 위해 혜초를 비롯한 구법승이, 그리고 아시아세계의 지배권장악이라는 무서운 야망을 품었던 고선지장군이 다녀간 이땅에 이제 가냘픈 우리의 무명직녀의 손으로 짜여진 직물류가 조용한 가운데 실속있게 파고들어와 애용되고 있는것을 보니 이 낯선땀도 남의 나라가 아닌것 같아 따스한 정같은 것을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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