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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노태우 단골집 ‘유정’ 폐점…쌀국숫집으로 개조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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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김영란법 합헌 판결 소식에 외식업계는 비상이 걸렸다. 직무 연관성이 있는 사람에게 1인당 3만원 이상의 식사를 대접할 경우 과태료를 부과한다는 시행령 때문이다.

“3만원으론 지금같은 품질 못 맞춰”
손님 대부분 고위관료·기업간부
세종정부청사 이전 이어 또 타격
신문로 ‘미당’ 등도 그만둘지 고민
한식문화 싸구려로 전락 우려도

걱정이 큰 곳 중 하나는 한정식업계다. 한정식집들은 공공기관이 몰려 있는 서울 종로구 일대에 많다. 1970~80년대까지 막후 정치의 장소였던 ‘요정(料亭)’을 대신해 생긴 고급 한정식집도 대부분 이곳에 있다. 정부부처가 세종시로 이전하며 한정식집들이 이미 큰 타격을 받았고, 그나마 버티던 곳들도 김영란법 시행 이후 손님이 더 줄 것을 우려해 업종 변경을 시도하거나 문을 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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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에 문을 닫은 서울 종로구의 한정식집 유정. 고위 공무원과 정치인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정부부처들이 세종시로 옮겨 가면서 영업에 타격을 받았다. 곧 이 자리에 베트남 쌀국숫집이 생긴다. [사진 신인섭 기자]

60년 전통의 유명 한정식집 ‘유정(有情·종로구 수송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곳은 점심 메뉴가 3만원대, 저녁 메뉴는 5만원대 이상으로 비교적 가격대가 높지만 조용한 분위기와 뛰어난 음식 맛으로 명성이 높았다. 노태우·김영삼(YS) 전 대통령 등 역대 대통령과 정치인, 고위 공무원 등이 자주 찾는 집으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이 식당은 이달 초 돌연 문을 닫았다. 공무원들이 세종시로 이동하며 손님이 대거 준 데다 김영란법의 영향으로 적자 폭이 커질 것을 우려해 폐업을 결정했다. 고모로부터 식당을 이어받아 40여 년간 운영해 온 손정아(68·여) 사장은 “단골손님 대부분이 기업 직원, 고위 공무원, 언론인이었는데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손님이 다 사라지게 될 것”이라며 “직원들 월급도 제대로 못 주는 상황이 될 것 같아 운영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유정이 있던 장소엔 다음달 쌀국숫집이 들어설 예정이다. 손 사장은 “1만원대 쌀국숫집은 장사가 좀 되지 않겠나”며 “이 골목 상권 자체가 고급 한정식집에서 평범한 음식점으로 바뀌게 됐다”고 했다.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서 한정식집 ‘미당’을 운영하는 김광훈(53) 사장도 “저녁시간대 괜찮은 한정식 메뉴를 시키면 10만원이 넘는데 고위 공무원이 많이 찾아 그나마 장사가 됐다”며 “김영란법 이후 이런 손님이 줄면 장사가 너무 안 될 것 같아 가게를 접을지 진지하게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요리 종류를 줄이고 싼 재료를 사용해 가격을 낮추는 등의 방안을 고려하는 한정식집도 많지만 대부분 “쉽지 않다”는 반응이다. 임대료와 인건비, 인테리어 비용이 많이 드는 데다 한정식이 여러 재료를 사용한 다채로운 요리로 구성돼 있어 재료비를 줄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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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청진동 광화문 인근에서 한정식집을 운영하는 김모(46·여)씨는 “코스요리 중 가장 저렴한 메뉴가 3만8000원이라 한쪽이 계산하면 법을 위반하게 된다”며 “2만9000원짜리 메뉴를 개발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음식 질이 떨어질까 걱정이 크다. 김씨는 “행사 손님과 고위 공무원, 기업체 임원 등이 전체 손님의 70~80%라 김영란법을 생각하지 않을 순 없지만 싼 코스요리를 만들려다 음식의 질이 떨어지면 손님들이 실망할까 걱정”이라고 했다.

종로구 익선동에서 40년 전통의 한정식집을 운영하고 있는 박모(54)씨는 “한정식은 좋은 재료를 활용해 까다로운 준비 과정을 거쳐야 하는 식문화인데 가격을 낮추려다가 ‘싸구려 한식’으로 전락할 수 있다. 전통 있는 한정식집들이 문을 닫게 되면 ‘한식 장인’들이 사라지고 한식 문화 발전이나 ‘한식 한류’도 지장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글=정진우·윤정민 기자 dino87@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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