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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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선거운동 과정에서부터 얼룩져온 필리핀대통령선거는 드디어 개표가 우여곡절을 겪는 등 심상치 않은 진통 속에 진행되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이번 선거를 지켜보면서 누가 당선되든 투표와 개표가 필리핀 국민 자신이 승복하고 세계가 납득할 수 있도록 공명하게 치러지기를 기대해왔다.
이번 선거가 공명정대하게만 치러진다면 「마르코스」 대통령 자신이나 필리핀의 장래에 밝은 전기가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마르코스」대통령이 당선된다해도 그것이 필리핀 국민의 정당하고도 직접적인 심판을 거친 것이라면 그 동안 누적된 부정의 책임을 이해 받고 72년 계엄선포 후 자의적으로 집권기간을 연장함으로써 상실한 정통성도 회복하는 좋은 기회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가 못한 것 같다.
현지보도들은 선관위소속 집계원 30명이 이탈, 개표가 「마르코스」후보에게 유리하도록 조작되고 있다고 폭로했다고 전하고 있다.
미국 등 19개국 선거참관인들의 눈에도 이번 선거는 부정과 불법·폭력으로 더럽혀진 것으로 나타나 있다.
미국의 참관인 단장인 상원외교위원장 「리처드·루거」 의원은 개표가 조작되고 있고 매표와 협박 및 투표함의강탈·대체를 목격했다고 폭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제 개표와 집계를 국회가 떠맡았다고 하나 국민들의 불신은 가셔지지 않는 것 같다.
국회자체가 절대다수 (1백31석·전 의석의 65%) 의 「마르코스」파로 구성돼 있는 데다 실제의 실무집행은 종래의 선관위가 계속 맡고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필리핀은 동아시아 자유세계의 중요한 후방기지다.
남지나해를 사이에 두고 베트남의 소련군 기지들과 대치해있는 클라크 (공군)·수빅 (해군) 두 기지는 최근 이 지역의 소련군이 강화되면서 그 전략적 가치는 더욱 높아져가고 있다.
필리핀의 내정이 불안하면 이 기지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미국의 조야가 당초부터 이번 필리핀선거에 깊은 관심을 표시해온 것도 그 때문이다.
「레이건」 미대통령이 필리핀의 여야에 대해 개표결과를 준수, 협조할 것을 당부하고 「스피크스」 대변인이 「연정형태」를 촉구하는 발언을 한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미행정부의 의도가 반드시 필리핀여야의 연립정부 구성을 요청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 (백악관 한 관리의 말) 고 해도 큰 혼란없이 정정이 안정되기를 바라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지금 필리핀은 「마르코스」 진영과「코라손」 진영으로 양분되기는 했지만 참다운 적은 필리핀전역에서 준동하고 있는 공산세력이다. 양극의 대결을 틈타서 공산분자들이 한층 그 세력을 뻗친다면 현재의 여야갈등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미국의 이익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는 것은 명고관화하다.
필리핀에서의 미국의 군사적 이해가 한반도정세와도 직결되는 것은 물론이다.
우리가 필리핀선거에 관심을 기울이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따라서 「마르코스」 대통령과 「코라손」 여사 등 필리핀의 정치인들이 지금 당장 할 일은 보다 대국적인 시각을 갖고 지방 미국의 선의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일이 되어야한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선거결과에 승복하여 자기가 패배하면 깨끗이 물러가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한바 있으나 이 말도 투표와 개표의 공명이 전제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은 물론이다.
한시바삐 「마르코스」 의 명쾌한 단안이 내려져 65년 자유선거를 통해 현직대통령 「마카파갈」 을 누르고 민선대통령으로 당선되던 그때의 참신한 민주투사로서의 그의 떳떳했던 모습을 다시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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