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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포후 시민들 폭민으로… 천이, 장제스에 파병 요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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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9호 28면

1 1945년 10월, 대만성 행정장관으로 타이베이에 부임한 천이(오른쪽).

중국인들에게 구전되는 말이 있다. “수재들의 반역은 성공한 적이 없다. 말이나 계획만 그럴듯할 뿐, 결국은 실패로 끝난다. 이유는 간단하다. 경험과 용기가 부족하고 무장세력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대만의 2·28 사태도 그랬다. 사망자가 발생하자 행정장관 천이(陳儀·진의)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순찰하던 사병들이 총기를 함부로 다뤘다. 닥치는 대로 발포했다. 밤새 총성이 그치지 않았다.


한밤을 공포로 지새운 시민들은 날이 밝자 폭민(暴民)으로 변했다. 천이에 대한 화풀이를 바다 건너온 외성인(外省人)들에게 해댔다. 관공서와 외성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습격했다. 규모에 비해 사망자는 극소수였다. 원성의 대상은 천이 한 사람이지 외성 동포가 아니었다.


국민당 대만성 대표와 타이베이(臺北) 시의원 등이 사태수습에 나섰다. 행정장관에게 “계엄 해제, 구금자 석방, 발포 금지, 관민합동처리위원회 구성” 등을 요구하기로 의결했다.


천이는 이들의 의견을 수용했다. “금일 자정을 기해 계엄을 해제한다. 사망자에게 20만 원을 지급한다. 2월 27일 부상당한 담배상인에게 치료비 5만 원을 지급한다. 사후 처리를 위해 2·28 사태 관민처리위원회를 구성한다. 행정장관은 처장 다섯 명을 위원회에 파견한다.”


타이베이의 폭민들은 천이의 성명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3월 2일, 사방에서 크고 작은 병원을 습격했다. 부상으로 입원 중인 외성인들을 끌어내 구타했다. 국립 대만대학과 사범대학 학생들, 고교생 수천 명이 중산당(中山堂)에 집결했다. “정치민주” “교육자유”를 내걸고 시민들의 폭거를 지지했다. 남부 도시 가오슝(高雄)에서는 경찰서가 모조리 털렸다, 외성인들의 시신이 거리, 골목 할 것 없이 난무했다.


당황한 천이는 처리위원들을 불러모으고 수습안을 내놨다. “폭행 참가자들의 행위를 불문에 부친다. 체포된 사람들을 전원 석방한다. 내성인 외성인 할 것 없이, 사상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한다. 처리위원회에 각계 민간 대표들을 추가 영입한다.”


3월 3일 오후 처리위원회 첫 회의가 열렸다. 심상치 않은 요구가 나왔다. “군인들은 금일 오후 6시까지 병영을 떠나라. 헌병 대신 학생들이 치안을 전담한다.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라. 경찰을 해산하라.” 장관공서 대표들이 이의를 제기하자 민간 대표들이 맞받았다. “공무원들은 도망가고, 경찰관들도 제복을 벗고 근무지를 떠났다. 달리 방법이 없다.” 천이가 파견한 다섯 명은 이날 이후 회의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좌파학생들은 들떴다. 비밀회의를 열었다. 좌익문화 전파자 궈슈충(郭琇琮·곽수종)이 모임을 주도했다. 항일 경력이 있는 청년 지식인의 한마디는 무게가 있었다. “문화투쟁(文鬪)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다. 무장투쟁(武鬪)을 전개하자.” 3월 8일로 거사 날짜까지 못박자 질문이 잇달았다. “무장투쟁을 하려면 무기가 있어야 한다.” 궈슈충은 한마디로 일축했다. “이미 준비됐다. 타이베이 학생을 중심으로 학생군만 조직하면 된다.” 신중한 사람들은 의아해하고, 급한 축들은 흥분했다. 궈슈충의 중공 입당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처리위원회는 지방에 분회를 신설하고 공상은행(工商銀行)에 2000만 원을 요구했다. 전국의 청년들에게 대만청년자치총동맹 결성을 촉구하고 강령까지 만들었다. 정치개혁안도 통과시켰다. “장관공서 비서장과 처장 과반수를 대만인으로 충당한다. 공공사업은 대만인이 책임지고 경영한다. 언론·집회·파업의 자유를 보장한다.”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천이는 난징의 장제스(蔣介石·장개석)에게 진압을 위한 파병을 요청했다. 처리위원회는 강제해산 시켰다.

2 문화활동을 통해 대만인의 항일을 주도하던 시절의 궈슈충(앞줄 왼쪽에서 둘째). [사진 제공 김명호]

3월 8일 국민당 군 1개 사단이 가오슝과 치룽(基隆)에 상륙했다. 무자비한 진압이 시작됐다. 청년 2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 대학에 재직 중인 대만 출신 여교수의 회고를 소개한다. “아버지는 대륙 출신, 엄마는 토종 대만 사람이었다. 2·28 사태 당시 나는 겨우 네 살이었다. 국군은 기관총을 난사하며 상륙했다. 얼마나 무서웠던지 두려움이 평생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흔히들 대만 동포들만 수난당했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엄밀히 말하면 2·28 사태은 대륙 출신 동포들에게도 공포의 시기였다. 사건 초기, 대만인들은 가까이 지내던 외성인을 보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국군이 상륙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대만인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할 때 대만 동포를 보호한 외성인도 많았다. 아버지도 사건 초기 대만인들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장제스 사후 3년간 대만총통을 역임한 옌자간(嚴家?·엄가감)은 사건 초기 타이중(臺中)에 출장 중이었다. 명망가 한 사람이 숨겨주는 바람에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이 지역은 외성인에 대한 배척이 유난히 심했다.


2·28 사태은 주도세력이 없는, 우발적인 사건이었다. 처리위원회도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모이다 보니 확실한 지도자가 없었다. 과부들만 양산한 채 허망하게 끝났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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