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 둔 「카드」 있으면 내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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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송진혁<본사 정치부장>]해가 바뀌고 새해가 온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해가 바뀐다고 없던 돈이 생기거나 정세가 갑자기 호전되는 것은 아니지만, 새해가 되면 새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더우기 지난 1년이 잘못되고 후회가 많을 수록 새로 시작할 계기를 잡는다는 것은 고맙고 소중한 것이다.
정치에 있어 새해는 그런 점에서 더욱 각별한 뜻이 있는 것 같다.
지난해처럼 정치가 뒤엉키고 꼬이고 볼썽 사납고 실망스럽고 불신의 대상이 된 시절도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정치가 그렇게 시원찮게 돌아간 데 대해서는 그런 정치에 직·간접으로 인과 관계를 가진 정치인들 역시 마음속으로는 적잖게 불만스러웠을 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당사자들로서는 일단 사태에 빠져들면 논리의 자전성도 있고 해서 잘못된 흐름이라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강경과 강경으로 맞서고 정치 행위를 경찰이 손대는 일이 잦아지고 협상은 깨지고 「단독」을 하는가 하면 농성이 벌어지고 날치기가 나오고… 온갖 시원찮은 입들이 다 벌어졌던 게 아닌가.
사실 정치판에서 고소·고발이 잦고 수사·소환·기소 따위의 말이 자주 나오는 것은 전례로 미루어 매우 예감이 좋지 않은 현상이다.
작년의 이런 정치가 작년에 끝나지 않고 자꾸 계속됐던들 정계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새로 시작하기는 힘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고맙게도 작년이 끝나고 새해가 되니까 작년의 일은 기왕지사로 돌리고 자연스럽게 새로 시작해볼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지만 새해가 되니 사람들의 마음도 「돌이켜 보건대」의 전망조가 아니라 「바라 보건대」의 전망조가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어지럽던 작년 일보다는 새해의 새 전개에 더 관심을 갖고 주시하는 것이다.
올해야말로 우리 정치의 내용을 가를 분수령의 한 해가 아닌가 한다. 햇수로는 2년이 남았지만 88년 문제를 넘기는 정치 방식이 올해 중에는 윤곽이 나올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타협과 합의의 정치로 가느냐, 대결의 정치로 가느냐가 올해 중엔 판가름날 것으로 보인다. 후자가 될 경우 파국밖에 맞을게 없다는 점에서 누구나 전자를 희구하고 있지만 각당·각파·각인의 이해관계·은원 관계·체질·사고방식 등을 생각하면 지극히 어렵지 않을까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지난해 정치의 연장을 생각한다면 새해 들어서도 대결고조의 코스를 치달을 위험성이 크다.
누구도 원치 않는 이런 코스를 피하기 위해 우선 여야에 말하고 싶은 것은 「카드」를 갖고 있다면 더 이상 감춰두지 말고 이제는 내놓으라는 것이다.
여야는 지난 1년 호헌·개헌으로만 맞서 갔을 뿐 아무런 논의의 진전도 보지 못했다. 모든 정치문제가 헌법문제를 축으로 하고 있는 이상 이 문제에 관한 여야의 협상선이라 할까, 타협의 한계 같은 것이 나오지 않고는 아무런 본질적 대화나 타협도 보기 어렵다.
여당은 과연 「호헌」외에는 대안이 없는가. 호헌이라면 88년을 지나 90년대에까지도 호헌인지, 88년을 지난 후에는 달라질 수 있는 것인지, 달라질 수 있다면 어떤 내용인지 힌트라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야당은 정녕 직선제 말고는 관심이 없는가. 내각 책임제나 절충제나 다 이미 검토는 끝내고 더 이상 거들떠보지도 않기로 결론을 내렸는가. 그리고 개헌은 언제까지 한다면 참을 수 있는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야당 나름으로 카드를 내야 한다.
여야간에 이런 카드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국민을 실망시키기 쉽다. 타협과 대화가 아니라 완승과 독식을 추구한다는 비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정치를 보면 의문 투성이였다. 88년 이후에는 어떤 통치 형태 아래서 우리가 살아갈 것인지, 여권에서는 어떤 인물이 후계 가능성이 있는지, 헌법은 바뀌는지 안 바뀌는지, 바뀐다면 언제 바뀌고 안 바뀌면 영영 안 바뀌는지 일정한 때까지 안 바뀌는지 등등 통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이런 정치의 가장 기본적인 사항이 이처럼 홍몽 상태에 있어서는 정상적인 정치 운행이 되기 어렵다.
그런 만큼 새해에는 단순히 호헌-개헌만 내세우지 말고 구체적 내용과 협상선을 갖고 논의해 달라는 것이다. 실제 여야 모두 어느 정도의 신축성은 갖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다음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공통의 광장을 넓혀 가는 정치를 해달라는 점이다.
민정·신민·국민당이나 신보수회나 민한당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보수정당·보수세력이라는 점에서는 한편이다.
무역 마찰로 미국의 압력에 지혜를 모아야 할 때는 한국의 이익이라는 공통의 장에 같이 서게 됨을 피할 수 없다.
북한과의 대화나 대결에 있어서도 초당·초파 적 입장이 당연하고, 극소수라는 급진 좌경에 대해서도 걱정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다. 공해·청소년문제·교육문제와 같은 중요 정책 과제들도 여야가 중지를 함께 모으면 좋을, 같이 걱정해도 무방할 훌륭한 분야다.
작년에 보면 이런 「같은 편」적인 요소는 애써 외면하거나 과소 평가하고 서로 「다른 편」적인 요소 대립되는 요소만 그게 부각시켜 허물을 들추고 흉을 보는 정치를 해 왔다.
새해에는 다른 편으로 갈라서서 다투다가도 같은 편으로 걱정할 일은 같이 걱정함으로써 서로 「공존」을 확인하는 정치를 보여주기 바란다.
이처럼 공통의 광장을 넓혀가면서 기본적인 정치문제에 관해서는 구체안과 협상선을 피차 내놓고 논의함으로써 어렵고 힘들지라도 타협과 합의의 코스로 새해 정치가 전개되기를 기대한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을뿐더러 시기적으로도 이젠 더 이상 늦출 여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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