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서역서 만난 고구려인의 기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저 멀리 세계 4대 산맥의 하나라는 카라코룸의 가파른 연봉이 숨을 가쁘게 한다. 만년설의 그 너머론 중공 땅.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를 뒤로하고 일로 북진, 자동차로 꼬박 하루를 달려서야 해발 1천 4백m의 조그만 산악 도시 기르기트에 닿는다. 바로 신라 승 혜초가 말한 소발률국. 지금부터 1천 2백년 전 고구려인의 강건한 기개를 만천하에 폈던 고선지 장군의 숨결이 서려있는 땅. 지금 고 장군은 어디 있는가-.
이용범 교수(동국대 대학원장·동양사)는 최근 동국대 학술 조사단을 인솔, 북부 파키스탄의 카라코룸 하이웨이를 따라 현지 유물·유적조사에 나섰다. 그는 중앙일보에 역사 기행 『카라코룸 하이웨이를 가다 - 고선지 장군의 발길을 따라』를 연재키로 했다. 연재에 앞서 갓 돌아온 그를 만났다.

<남부 카라치서 출발>
-어떤 계기로 다녀왔는지요.
『올해로 동국대가 개교 80주년을 맞습니다. 이번 해외 학술 조사단의 파견은 그 기념 행사의 하나지요. 오랜 숙원의 하나를 푼 셈입니다.
-현지에선 무엇을 주로 조사했습니까.
『우선 책 속에서만 알고 있는 고선지 장군이나 혜초 등 우리 선인들의 혁혁한 공적을 현지 답사, 확인함으로써 한국사의 영역 확대를 시도하고자 했습니다. 아울러 간다라 중심의 불교 유물·유적도 새로운 시각으로 조사, 한국 불교 예술의 새 경지를 열어 볼 욕심이었지요.
-누구와 함께 갔습니까.
『모두 7명이었지요. 동국대의 이재창·정명호·장충식·문명대·정병조·서경수 교수 등 역사학자·미술사학자·불교학자들이 한 팀을 이뤘지요.

<역대 종족 화폐 전시>
-어떤 코스로 다녀왔는지요.
『파키스탄의 남부 카라치에서 모헨조다로, 라호르를 거쳐 수도 이슬라마바드를 지나 탁실라·다수·칠라스·기르기트까지 갔다 왔지요. 험준한 카라코룸의 산 속·인더스 강을 따라 뚫린 하이웨이를 달렸어요. 지난해 12월 7일부터 올 1월 2일까지 26박 27일 간이었습니다.』
-전체적인 인상은 어떠했습니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지역이 사람 살기가 어려운 낙후된 지역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찌기 혜초는 이곳을 빈곤과 역경에 찬 지역으로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생존의 길은 어디에도 열려있는 법입니다. 혜초는 당시 중국에서도 가장 황금기인 당 제국의 안목으로 이곳을 보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곳은 12월인데도 장미와 유채 꽃이 만발하고 감귤이 소담스럽게 열려 있었습니다. 천혜의 인더스 강이 흐르고 있었어요. 인간은 원래 자연의 저항이 가장 약한 곳을 골라 살아왔지요. 이곳은 바로 그런 자연조건을 갖춘 곳이며 그로써 인더스 문명을 낳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나폴레옹보다 훌륭>
이 교수는 아득히 먼 옛날로부터 역사적인 맥을 짚어왔다.
『이곳은 마치 인종의 전시장 같은 곳이지요. 참으로 다양한 종족들이 이곳으로 돌진해 왔어요. 기원전 15∼12세기엔 인도의 아리안족이, 기원전 4세기엔 그리스인이 쳐들어 왔어요. 서기 1세기엔 월지족이, 이어 스키타이족과 백흉노가 침입했고 그후 이란 족과 터키족이 지배했으며, 13세기엔 몽고족의 지파가 내려왔어요. 지금도 그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파키스탄의 어느 박물관을 가보더라도 역대 각 종족의 화폐가 나란히 전시돼있다는 점입니다.
이 교수는 이토록 복잡한 민족 구성아래서도 국가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이들에게 공통적인 두 가지 요소, 즉 우루두어와·이슬람교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 카라코룸 하이웨이는 어떤 길인가요.
『지난 75년부터 80년까지 중공에서 1만명, 파키스탄에서 1만 5천명의 병력을 투입, 옛 비단길을 따라 만든 2차선의 대 신작로입니다. 중공의 카라코룸과 곤륜 산맥을 잇는 타시쿠르간에서 출발, 실크로드의 일부인 카라코룸의 옛길을 따라 내려와 기르기트(혜초의 소발률국)와 칠라스·베샴·이슬라마바드를 거쳐 남단의 카라치까지 연결되지요.
-이 길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지요.
『현재의 국제 상황으로 볼 때 고선지 장군이 활약하던 당시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고선지 장군은 어떤 인물인가요.
『일찌기 영국인 사학자 「오렐·스타인」은 그의 책에서 고선지의 기르기트 전투는 「나폴레옹」의 알프스 전투보다 뛰어났으며 그의 전술은 「나폴레옹」의 여하한 참모진도 당해낼 수 없을 만큼 훌륭했다고 극찬했고 시인 두보는 그를 위해 시를 썼습니다. 그는 고구려인의 기개를 유감없이 폈던 인물이지요.』
고선지(?∼755년) 장군은 고구려 유민으로 나라가 망하자 아버지와 함께 당나라로 잡혀갔으며 천재적인 재질로 20세에 장군이 됐다. 3차에 걸친 서역 정벌로 무공을 세워 중용 됐으나 후에 부관의 무고로 진중에서 참형 당했다.

<소·중공 영향력 각축>
『747년 고 장군이 타시쿠르간을 출발, 아프가니스탄 와캉(혜초의 호녕국)을 거쳐 파키스탄 서북부의 탈코트를 빠져 나와 기르기트를 정벌, 수년간 당나라의 지배하에 넣은 것은 국제 정치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지요.
즉 당시 동에선 티베트가 대발률국과 소발률국을 기반으로 중국의 실크로드를 장악하려 하고, 서에선 아라비아 세력이 동진 해 역시 실크로드를 위협하고 있었어요. 자칫 티베트와 아라비아가 손잡는다면 실크로드는 하루아침에 허물어지고 마는 형국이었지요. 이들의 제휴를 차단, 실크로드를 확보한 것이 고 장군의 업적이었습니다』
-현재의 국제상황이 어떻게 당시와 같은가요.
『서쪽의 아프가니스탄에 발판을 둔 소련은 항상 동쪽의 인도에 세력을 심으려 부심하고 있습니다. 이때 중공은 인도와의 불화 상태 속에서 파키스탄과 손잡고 이 길을 닦음으로써 우선 동서의 소련과 인도를 격리, 상호 접근을 견제하게 됐습니다. 또한 중공 상품이 파키스탄으로 흘러 들어가는 루트를 마련하게 됐지요. 참으로 유사한 상황입니다.』
-역사의 반복인가요.
『순환적 반복 같은 것 아니겠어요.』 <이근성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