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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TV 드라머 『임진왜란』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인기가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일본에 다녀 온 통신사들의 상반된 보고, 조정 중신들의 파벌싸움, 선조의 참담한 몽진 길, 경복궁 대화와 왜군의 한양성 무혈 입성, 평양성의 함락 등 역사의 악몽들이 브라운관에 되살아나 시청자들의 회한과 울분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서남해를 제패한 이순신 장군의 수군과 거북선이 없었던들. 이 드라머는 벌써 끝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가운데서 6일 밤 방영된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육전에서 최초로 왜군을 패퇴시킨 모습을 보여주었다.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6일간 계속된 이 혈전에 동원된 적의 병력은 2만명, 아군은 목사 김시민이 이끄는 수성병력 3천 8백명에 노약자와 남장을 한 아녀자들뿐이었다.
기록을 보면 그때 진주성민들 중 맨손만 가진 사람들은 큰돌을 연방 내려 던졌고, 불붙인 짚단과 끓는 물을 내려 부어 적은 머리가 깨지는가하면 화상을 입기도 했다.
진주성을 잃는 것은 삼남의 곡창을 적에 고스란히 내주는 꼴이다. 그래서 풍신수길은 사력을 다해 진주성 공략을 독려했고, 아군은 필사의 항전으로 성을 지킨 것이다.
역사적으로 임진왜란(1592∼1598년)하면 조선군의 대패로 알려져 있는 것이 이른바 「식민지 사관」의 전형이다. 그러나 사실은 전후 7년간에 걸친 이 전란에서 우리측이 몰린 것은 초전 2개월뿐이다. 4월 14일 부산포로 침공한 왜군이 6월 18일 평양 성을 함락시킬 때까지다.
뿐만 아니라 평양성에 입성할 때의 왜군은 이순신 장군에 의한 수로차단과 각지의 의병·승병들에 의해 보급이 끊겨 개선군이 아닌 패잔병 신세로 뒤바뀌었다는 것이 일본측 기록이다.
1563년 31세의 나이로 일본에와 65세까지 있은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프로이스」가 쓴 『일본사』 제3권은 임진왜란 때 소서행장을 따라 종군했던 기독교인 병사들의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전란의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전투가 끝났을 때 소서행장의 부하 장수들은 평양으로부터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후방으로 퇴각할 것을 강력히 건의했다. 참모들의 의견인즉, 병사들은 피로에 지칠 대로 지쳐 있고 또 많은 병사들이 부상하거나 전사했으며, 무기와 탄약은 떨어지고 군 장비들은 더 이상 쓰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적(조선군)이 다시 공격해 오면 일본군은 전멸을 면치 못하게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실제로 조-명 연합군은 이듬해 1월초 평양성을 일거에 탈환하고 곧바로 남하, 20일만에 한양 근교까지 적을 내몰았고 4월 하순에는 수도를 완전 수복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역사의 구석구석에 알게 모르게 도사리고 있는 「황국사관」은 국민 정신 건강에도 해롭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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