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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 숙청, 언론 탄압 등 독재화 에르도안 정권 타도 명분 내세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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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호 4 면

터키 경찰이 16일 이스탄불 보스포루스해협 대교에 버려진 쿠데타 세력의 탱크 위에 올라서자 터키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AP=뉴시스]

커튼 뒤에서 이어지던 힘겨루기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일단의 터키 군부가 15일(현지시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쿠데타는 ‘6시간 천하(天下)’로 허무하게 끝났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오랜 기간 계속된 이슬람주의자 에르도안 대통령과 극단적 세속주의파 군부의 악연이 도사리고 있다.


터키 군부는 세속주의와 민주주의, 공화국의 수호자로 여겨진다. 터키 헌법에 군이 국가의 수호자로 표현돼 있을 정도다. 터키 건국의 아버지자 국부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남긴 그림자다. 그런 탓에 터키 군부는 민간 정부와 함께 사실상 터키를 지배해왔다.


1990년대 민주화가 이뤄지고 정치가 성숙하자 군의 정치 개입은 어려워졌다. 군은 피를 흘리지 않는 쿠데타를 이뤄냈다. ‘포스트 모던 쿠데타’로 불리는 97년 ‘2·28 쿠데타’다. 군은 헌법재판소를 끌어들여 당시 집권당인 이슬람 성향의 복지당을 폐쇄했다. 그리고 이때 이번 쿠데타의 표적인 에르도안 대통령이 등장한다. 94년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된 뒤 시장으로 재임하던 에르도안에게 터키의 세속주의 체제를 파괴한다는 혐의를 씌운 것이다. 에르도안은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된다. 법의 철퇴를 맞은 것은 에르도안만이 아니었다. 총리와 집권당 인사들의 정치 생명도 끊어졌다.


수감 생활을 마치고 나온 에르도안은 다시 세를 결집했다. 2001년 정의개발당(AKP)을 창당한 뒤 이듬해 총선에서 압승했다. 권력을 쥔 에르도안은 경제 발전과 이슬람 전통을 강조하며 국민의 지지를 얻어갔다.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유럽연합(EU) 가입을 추진하며 터키인의 마음을 얻었다. ‘제2의 국부’ 혹은 ‘21세기 술탄’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2014년 대선까지 모든 선거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권력이 오래되면 부패하게 마련이다. 권력욕도 강해진다. 총리 3연임만 가능한 AKP의 당헌이 발목을 잡자 에르도안은 헌법을 개정해 2014년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러시아 대통령을 연임한 뒤 총리를 거쳐 다시 대통령이 된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빗대 에르도안에게 ‘터키의 푸틴’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다.


에르도안이 영구집권의 꿈을 꾸기 시작한 이때부터 에르도안과 군부, 반에르도안파의 갈등은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갈등의 씨앗은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7년 당시 총리이던 에르도안은 친이슬람 정부의 출범을 막으려는 군부와 대립했다. 에르도안은 칼을 빼들고 장군과 대학 총장, 관료, 기자, 변호사 등 수많은 사람을 체포했다.


2010년 일간지 타라프가 보도한 ‘철퇴작전’은 또 다른 쿠데타 음모를 드러냈다. 2003년 군부가 친이슬람 정부의 출범을 막기 위해 이슬람 사원을 폭파하고 전투기 격추를 위장하는 등 쿠데타 계획을 세웠다는 보도였다. 이후 에르도안 정권은 군부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2012년에는 전 참모총장까지 체포했다.


그렇지만 이번 쿠데타를 촉발시킨 결정적 전환점은 2013년이다. 6월 이스탄불 중심가 탁심의 게지공원을 철거하자 이에 반대하는 친환경주의 청년들이 시위에 나섰다. 이 시위가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변질됐고, 터키 정부가 과잉 진압에 나서며 사태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시위대 몇 명이 목숨을 잃었고 에르도안은 독재자로 비춰졌다.


또한 이해 12월 에르도안의 아들인 빌랄 등이 연루된 부패스캔들이 터지며 에르도안은 위기를 맞았다. 한때 에르도안의 동지였지만 99년 이슬람 탄압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자발적 망명’ 상태로 지내는 온건파 이슬람 학자 펫훌라흐 귈렌의 지지자들이 부패 척결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에르도안은 ‘귈렌파’로 분류된 경찰관과 검사·판사 수천 명을 숙청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16일 귈렌을 이번 쿠데타의 배후로 지목했다.


시리아 내전은 에르도안 정권이 새로운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빌미를 제공했다. 에르도안은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 제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며 반정부 무장 세력을 지원했다. 문제는 반정부 세력과 에르도안 정부의 투명하지 않은 관계다.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터키는 수니파 무장조직 ‘이슬람 국가(IS)’에 합류했던 세력과 거래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반에르도안 세력은 에르도안이 IS와 연계돼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터키에서 일어났던 테러 사건의 배경에 이러한 불투명한 관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게다가 터키에 있는 300만 명이 넘는 시리아 난민에게 시민권을 주겠다고 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독재 정치와 부패, 시리아 내전 간섭으로 에르도안 정권에 대한 불만은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쿠데타가 일어나면 성공 가능성이 크기 마련이다. 하지만 상황은 에르도안의 승리로 끝났다.


그렇다면 쿠데타 세력이 미숙한 시도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탁심 게지공원 사태와 부패스캔들 이후 에르도안은 경찰과 검찰·사법부를 자기 입맛에 맞게 재편하기 시작했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등의 사법부는 에르도안에게 복종하는 인물들로 채워졌다. 자신에게 반대 입장을 표명한 언론사와 기업도 강제로 인수했다. 자신의 정책에 반대한 총리까지 하야시켰다. 숙청과 탄압의 칼바람 속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남아 있었던 곳이 군부였다.


세속주의 사상이 강한 터키 군부는 에르도안 정권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예전에는 잦은 쿠데타 시도를 했지만 민주화의 분위기 속에 국정에 대한 간섭을 자제해왔다. 하지만 에르도안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군에까지 손을 뻗치자 일부 군부 인사가 불만을 드러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고 군부 내 불만 세력이 쿠데타 시도까지 나설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사태가 진정됐지만 에르도안을 비롯한 AKP 인사들은 터키 국민에게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지키라고 요청하고 있다. 방송국과 공항을 접수하고 참모총장까지 납치했던 이번 쿠데타 시도는 터키 사회에 큰 상처를 준 것이 확실하다. 군인과 경찰이 서로 총을 겨눴고 민간인이 군인이 쏜 총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터키가 대혼란에 빠지게 됐다.


알파고 시나씨 터키 지한통신 한국특파원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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