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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 문학

고독 바깥으로의 한 걸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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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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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소설가 은희경의 새 책이 ‘나왔다’는 소식은 뉴스가 되지만 그 책이 ‘좋다’는 사실은 뉴스가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부터 아주 진부한 소식을 독자들에게 전해야 한다. 은희경의 여섯 번째 소설집 『중국식 룰렛』(창비·2016)은, 좋다. 언제나 그랬듯, 구조가 치밀해 서술의 낭비가 없고, 흐리멍덩한 문장은 박멸돼 있으며, 감정의 방류 없이도 인물을 정확히 이해시킨다. 은희경다운 베스트를 꼽으라면 역시 ‘중국식 룰렛’과 ‘정화된 밤’이다. 그러나 나에게 특별한 울림을 남기는 작품은 ‘별의 동굴’이었다. 왜냐고, 나는 지금 내게 묻고 있다.

은희경 소설집 『중국식 룰렛』

오피스텔 11층에 혼자 살면서 9년째 박사 논문을 쓰고 있는 40대 중반의 시간강사가 동네 안경점에서 보내온 생일 축하 메시지 소리에 눈을 뜨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이제 시간강의 자리마저 끊길 상황인데도 초조해하지 않는다. “현실을 수긍하고 거기에 맞춰 자신의 입장과 한계를 정하는”(143쪽) 식의 태도가 몸에 배어 있는 탓이다. 최소주의의 삶이라고 할까. 크게 절망하는 일이 없도록 최소한의 희망만을 가동하는 삶. 물론 그 자체로 옳거나 그른 삶은 아니다.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겪는 사건과 그의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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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소설집 『중국식 룰렛』을 낸 은희경. “삶을 의도치 않게 이끄는 우연에 대한 얘기”라고 말했다. [중앙포토]

그의 삶의 균형을 깨뜨리는 두 가지 사건이 전개된다. 하나는 공교롭게도 그와 생일이 같고 그날을 혼자 보낸다는 공통점이 있는 한 여자와 말을 섞기 시작했다는 것. 공원에서 그녀는 그들 둘의 산책 방향이 늘 반대라는 점을 재치 있게 일깨워 주면서 그가 굳게 잠가둔 삶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다른 하나의 사건은 부정맥 증상이 심해져 수술 일정을 잡았고 그 여파로 이사를 하게 됐다는 것. 초라하나마 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책들을 버리고 그 방을 떠난다는 것은 그에게는 육체적 수술 못지않게 아픈 정신적 수술이다.

서사적 절정은 수술을 앞둔 그의 통렬한 자기 성찰이 이루어지는 대목 어디쯤에 있다. 부정맥 수술 사망 확률이 0.01퍼센트라는 말을 듣고 그는 생각한다. “나쁜 뉴스를 보고 내 일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면 남의 행운 역시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 지금 역시 그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큰 행운이 없었으니 0.01퍼센트의 불행 또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대체 이처럼 비겁한 자기 위안의 논리로 얼마나 많은 억울함과 박탈감에 굴복해 왔던 것일까. 식은 밥 같은 중간지대의 안전이 그에게 남긴 것은 고독뿐이었다.”(168쪽)

‘중간지대’에서 살아온 삶의 진실은 결국 ‘안전한 고독’일 뿐이라는 것. 은희경은 주인공이 제 삶을 회고적으로 요약하면서 무너져 내리는 대목을 세상에서 가장 잘 쓰는 소설가 중 하나여서 위 대목 전후로 내가 크게 동요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이 소설에 유독 그랬던 것은 그가 2014년 4월 16일의 사건 이후 세상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느꼈다는 인터뷰를 먼저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소설은 저기서 끝나지만 나는 수술 이후 회복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그녀와 ‘같은’ 방향으로 ‘함께’ 산책하기.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