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현 후지노끼고분의 주인공은 "신라파냐 백제파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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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3일 발굴이 중단된 일본나라(나량)현 이까루가(반구)의 후지노끼(등의목)고분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해 최근 일본학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이 무덤의 주인공이「소가」 (소아도목· ? ∼507)일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고 있었으나 작가「구로이와」(흑암중오)씨가 동시대에 「소가」와 대림관계에 있던 「모노노베」 (물부미여)일 것이라는 설을 내놓았으며 사학자「아리사까」유판륭도)씨는 백제와 가까왔던 「하수히」(파제편)의 무덤이라고 주장,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동경=최철주 특파원>
일본서기 (황실중심의 일본국가성립사)에 의하면 일본의 불교전래는 538년 백제로 부터로 되어있다. 이때는「긴메이」 (흠명)천황때로 오오오미(대신·좌대신에 해당)인 「소가」 의 세력이 강화되고 있던 시기였다. 일본역사에는 삼국시대에 지금의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경계지역 일대를 미마나 (임나)일본부라 부르고 당시 영유를 주장하고 있으나 「구로이와」 씨는 이 사실의 가능성을 희박하다고 보고 있는 일본인이다.
당시 「모노노베」는 신라와 가까왔던 인물이다. 오오무라지 (대련·우대신에 해당) 「오오또모노가나무라」(대반금촌)가 실각한후 「소가」 와 「모노노베」의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는데 백제의 도래인인 「소가」는 당연히 백제파였다. 「모노노베」는 「소가」와 대항하기 위해 친신라 정책을 취하기도 했다. 이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지 않던 신라가 긴메이 21년 (560) 갑자기 사신을 보낸것을 보면 알수있다. 다음해도 사신을 두번이나 보냈는데 사신의 서열이 백제의사신 밑에 들어 있음을알고 화를 내고 돌아갔다.
신라와 백제는 그당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외국의 권력자인 「모노노베」가 신라에 호의를 가진것을 안 신라가 친왜정책을 폈지만 백제파인 「소가」에 의해 한때 냉대를 받았다.
하지만 다시 「모노노레」가 득세, 긴메이 23년에도 두번 사신을 보냈으며 이들은모두 왜국에 귀화했다.
이후「긴메이」천황이 죽을때까지 신라는 해마다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백제는 긴메이 21년에서 32년까지 단한 번 사신을 보냈으며 조의를 표하는 사신도 없었다.
「구로이와」씨는 이같은 사실로써 이시기는 친신라정책이 유력한 시기였다고 말하며 신라왕이 신뢰하고 있던「모노노베」에게 호화로운 금동의 안장을 선물로 보냈다고 해도 이상할것이 없다고 풀이하고있다.
「모노노베」가의 본거지는 이까루가 옆을 흐르는 대화천 연변으로 6세기중엽 이까루가로 진출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소가」가 본거지는 가쓰라기 (갈성)·다께찌(고시)군이어서 이까루가와는 관련이 없는것으로 보인다고 「구로이와」씨는 주장하고 있다.
또 후지노끼고분에서 나온유물도 신라제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는것.
한편일본의학자들이 후지노끼고분의 주인공이 「소가노이나메」일것이라고 추정하는 이유는 ①이 고분이 「이나메」의 아들 「우마꼬」의 무덤으로 알려진 우무대고분과 닮았다는 점 ② 「이나메」의 증손 「이루까」(입록· ?∼645)는 「소가노구라쓰꾸리」(소아안작) 라고도 불리며 마구의 제작과 관계가 깊다는 점 ③출토품인 금구의 디자인은 신라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나 「이나메」자신도 백제뿐 아니라 신라불교를 받아들이려 노력했다는 점등을 들고 있다.
「구라이와」씨는 1924년생으로 l960년『배덕의메스』로 나오끼 (직목)상을 탄 일본의 작가이며 특히 나라와 아스까 (비조)를 무대로 한 역사소설을 많이 집필,6, 7세기쯤 일본의 역사에 조예가 깊다.

<"백제파「하수히」다"일본 사학자 「아리사까」 주장|흠명천황때 외교사절로 백제 특파 | 성왕이 댓가로 동제마취등을 선물
한편 일본의 역사학자 「아리사까」 (유판융도)씨 (관서대교수· 일본사)는 후지노끼(등의목)고분에서 나온 금동제 마구가 541년 중국량의 무제가 백제의 성왕에게 준 물건으로 이것을545년 다시 성왕이 일본의 가시와데노오미 (선신)「하수히」 (파제편)에게 준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하수치」는 그뒤 20∼30년 뒤에 죽어 말안장과 함께 후지노끼고분에 안장되었을 것이라고 「아리사까」 교수는 추정하고 있다. 그의 주장을 보면 (그는 임나일본부설을 인정하고 있다) -
「긴메이」흠명)천황 시대에들어 한반도 남부의 미마나(임나)를 둘러싼 정세는 위기적 양상을 떠고 있었다. 서쪽에는 백제가, 동쪽에는 신라가 판도를 넓히고 있었다. 천황은 즉위때부터 미마나 부흥을 최대과제로 삼고 있었으나 현지의 정세는 복잡하기만 했다.
미마나에는 일본사기에 「일본부」라는 것이 있어 미마나제국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여기에선 친신라파가 실권을 쥐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천황에게 선택되어 특파된 사람이 「하수히」였다.
「하수히」는 545년 3월처자를 데리고 백제로 갔다. 처자를 동행하는 것은 인질의 위험과 함께 교섭상대에게 신뢰를 얻을수 있는 잇점이 있었는데 이는 「하수히」의 결단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로간 「하수히」에게 생각지도 않은 비극이 일어났다. 날이 저물어 백제의 해안에서 머물렀는데 그의 어린 아들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날이 밝아 눈위의 호랑이 발자국을 따라 가니 바위굴안에 호랑이가 있었다. 입을 벌려 물려는 것을 혀를 잡고 오른손의 큰칼로 찔러 죽인후 껍질을 벗겨 돌아왔다.
이는 그해 11월 귀국해 그가 한 이야기다. 「하수히」는 불과반년만에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던 현지사태를 수습하고 평화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해 9월 백제는 이를 기려 일본부의 신하와 미마나제국의 왕들에게 특별한 선물로 「오의 재물」을 주었다고한다.
오는 중국의 강남을 가리키는 말이며 당시는 양의 무제시대로 백제는 541년 양에 조공을 바쳤는데 그 대신 「오의 재물」들을 손에 넣을수 있었다.
이때 최고의 공로자였던「하수히」가 최고의·선물로 양의무제가 조공의 답례로 성왕에게 준 저 훌륭한 안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가시와데노오미의 본거는 가시하라(강원)시부근으로 생각되고 있지만 아마 그 공로에 의해 이까루가로 새로운 거점이 주어진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가시와데노오미·가따부꼬」(경자)는 긴메이 31년 (570) 고구려의 사신을 접대한 인물로 뒤에 「소가노우마꼬」 (소아마자)가 「모노노레」 (물부단성)를 멸망시킬때 성덕태자와 함께 군을 이끌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하수치」가 언제 죽었는지는 밝혀지지않았으나 어린아들이 545년에 죽은것을 미루어 560년이나 570년에죽은것이 아닌가 추정되며 후지노끼고분은 그의무덤으로서 어울린다는것이 「아리사까」교수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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