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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81)제84화 올림픽반세기<30>58년 아시안게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제3회 아시안게임(1958년)은 일본 동경에서 열리게 됐다. 세차례 올림픽과 한차례 아시안게임을 통해 세계 스포츠의 견문을 넓힌 한국은 동경아시안게임에 총력을 기울였다. 1백만 재일동포의 성원도 열화와 같았다. 14개 종목 선수 1백19명, 임원 37명으로 유례없는 대규모 선수단이 파견됐다. 종래의 선수 「정예주의」원칙이 후퇴한 것도 이번대회였다.
동경아시안게임을 앞두고 57년겨울엔 우리 스포츠 사상 처음으로 종목별 합숙훈련이 서울과 부산·대구에서 실시됐다. 물론 당시 체육회의 재정이 형편없던 관계로 군부대의 협조를 받아 즉시문제를 해결했다.
역도는 농구팀과 한께 대구로내려가 숙소를 군인호텔로 잡고연승은 경북대체육관을 이용했다. 그런데 숙소에 어찌나 빈대가 많은지 선수들이 거의 잠을 자지못하고 고생하던 생각이 난다. 또 군부대에서 제공하는 식사도 시원찮아 우려 역도선수들은 따로 일반 식당에서 밥을 사먹으며 체중을 유지해야 했다.
동경아시안게임은 따로 선수촌이 없어 동경도심지의 제일호텔을 선수촌으로 이용했었다. 또 메인스타디움은 올림픽 (64년)이 거행될 국립경기장이었다.
5월24일 개회식에 이어 25일첫날경기에서 역도의 이장우(플라이급)가 대회 1호금메달을 획득, 한국선수단의 기세를올렸다. 역도에서는 이완영(페더급)이 금메달을 추가했고 황호동(라이트 헤비급)과 이용원(헤비급)은 은메달을 수확했다.
미들급에 출전한 나는 어이없이 실격당하고 말았다. 39세의 나이로 아시안게임에서 2연패하려던 나의 욕심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동경아시안게임은 선수로서 내인생의 마지막 출전이어서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동경아시안게임에서 가장 알찬수확은 사이클 경기였다. 단장 1명, 선수 4명의 단출한 팀으로 도로경기에만 출전한 우리팀은 개인전 1,2,3위(이홍복·노도천·김호순)를 휩쓸고 단체우승까지 차지, 국제대회에서의 첫 메달을 한움큼 쥐었던 것이다.
사이클의 이윤백감독은 출국전 자기 어머니의 당부대로 아침마다 새벽4시에 일어나 3배례를 올리며 승리를 기원했다고 하니 그정성이 가상했다.
복싱에선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따냈던 김기수가 화려하게 데뷔했다. 복싱의명문 성북고 재학생이던 김기수는 당시 F세의 소년복서로 웰터급에서 아시아를 제패해 돌풍을 일으켰다.
주최국 일본은 복싱에서 어처구니없이 편파적인 판정을 내려 빈축을 샀다. 라이트 웰터급 2회전 경기에서 우리 김득봉은 일본선수와 60-60으로 동점 판정을 받았으나 일본인 주심은 이유없이 일본선수의 승리를 선언했다. 이에 대해 우리선수단과 관중들이 항의소동을 벌이는 바람에 경기가 중단되는 사태로 발전했던 것이다.
김득봉은 2년후 로마올림픽에서도 메달을 눈앞에 둔 준준결승에서 일본인 심판의 농간으로 패배의 쓴잔을 마셔 억세게도 운이 없는 선수로 불렸다.
구기종목에선 축구·남자배구가 은메달을 차지했고 남자하키는 동메달을 따냈다. 특히 재일동포선수로 구성된 하키는 일본팀을 격파하고 동메달을 따내 더욱 통과했다.
이번 대회에서 한국은 육상·역도·복싱·사이클에서 각각 2개씩, 모두 8개의 금메달을 따내 필리핀과 동률을 이뤘으나 은메달에서 19-7로 뒤져 3위로 밀렸다. 일본은 금메달 1백12개중 절반이 넘는 67개를 휩쓸어주최국의 파워를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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