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본기의 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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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나라의 고려청자 분청사기나 백자등 도예공예의 아름다움에 관해서는 이미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바이고 세계도자사에 있어서의 위치도 그독자성으로 말미암아 점차 높아져 가고있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우리의 몇몇 선각자를 제외하고 우리들 대다수는 우리것의 아름다움을 발견치 못하고 외국인들의 앞지른 연구조사에 의해서 자극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근래에 와서는 국내대학에도 이방면에 관한 전문학과도 설치되어 연구조사 발표가 활발해진 것은 앞으로의 밝은 기대를 갖게 해준다.
우리 전통공예미술품중에서 가장 늦게 그 수준높은 미가 인정받게 된 것은 여러종류의 가구를 비롯한 조선시대 목기일 것이다.
해방전만 해도 어느 시곳집에 들어가면 으레 최소한 쌀뒤주, 장롱(장롱)이나 반담이 또는 찬탁자(찬탁자) 같은 것을 볼수 있었다.
물론 그질의 차이는 있을 망정 그치수나 모양에는 큰 차이가 없게 마련이었다.
이러한 목기들은 우리가 옥구조나 오랜 생활감정에 잘 맞도록 만들어 졌고 아울러 옛장인들의 멋에 대한 감각이 숨겨져 있었다.
그야말로 요사이 많이 쓰여지는 디자인의 근본정신인 용과 미를 겸비한 훌릉한 공예미술품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특히 해방후에는 많은 천대를 받고 때로는 헌신짝같이 버려지기도한 것이 사실이었다.
근래에 와서야 비로소 국내에서도 그진가가 발견되고 아껴지면서 놀랄만큼의 고가로 수장되는 사실을 볼 때 만시지탄을 금치 못하나 한편 다행한 일이 아닐수없다.
한국목기가 그 다양한 종류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우리의 심금을 끄는 것은 그 단순화된 형태와 잘 절제된 최소한의 장식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요소가 바로 오늘날의 현대디자인의 감각과 일치되는 연유이며 차원높은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근 30년전에 북부독일의 항구도시인 브레멘(Bremen)의 위버제무(Ueberseemuseum)에서 작품전을 가졌을때의 일을 잊을수가 없다.
그미술관 현관입구에 들어서면서 소중하게 진열된 우리나라 2층 장을 보았을때의 반가움과 가슴설렘을 잊을수가 없다. 안내인의 말로는 조선조 말기에 입수한 것을 자랑스럽게 입구에 장식해 놓고 있다는 것이 었다.
나는 한참동안 서서 쳐다보며 멀리멀리 떨어진 외국땅에서 다시 발견한 한국목기의 미를 잊을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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