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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유치등 스포츠에 큰 발자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3일 새벽 별세한 고 박종규IOC위원은 61년5월16일군사혁명이 일어난 그 순간부터 74년8월 육영수여사가 피격되기까지 13년3개월간을 고박정희대통령을 그림자처럼따른 측근이었다.
5·16당시 시청앞 광장에서 박정희소장의 오른쪽에 차지철대위와 함께 권총을 허리에 찬채 나란히 서있는 사진은 너무도 유명하며 공교롭게도 두사람이 모두 그후경호실장을 거쳤다.
최고회의시절에는 의장경호실장으로 있다가 박대통령이 청와대로 옮긴후 홍종철경호실장밑에서 차장을 잠시 지냈고 홍실장이 64년 문교차관으로 가자 이후 물러날때까지 10년간을 경호실장으로근무했다.
대통령의 측근으로 정치적영향력도 대단했으며 정계·재계깊숙이까지 그의 입김이 작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호실장을 물러난후에는 사격연맹회장·대한체육회장으로 체육에만 전념해봤다.
78년 10대 국회의원선거에 박대통령의 낙하산식(?)공천에 의해 마산-창원에서 공화당후보로 출마, 당선함으로써 정계에도 데뷔했다. 정계에서는 그의 경력과 관련하여 그를 「피스톨 박」이라고 불러 그이후 그의 닉네임으로 일반인에게까지 널리알려졌다.
10·26사태가 터지자 정계를 사실상 떠난 그는 구정치인등에 대한 권력형부정부패 조사가있은 5·17이 나기 한달전쯤인 80년4월 당시의 최규하대통령에게 자신의 재산상태및 축재사실에대한 조사를 스스로 요청해 세인들을 놀라게 하기도했다. 그는 그후 곧 공화당을 탈당했다.
그가 공화당을 탈당한지 4일후에 5·17이 터졌고 김종필·이후락씨등과 함께 당시 관계기관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경호실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그는 지방대학으로 거의명맥만 유지해오던 마산대학을 인수해 오늘의 경남대학교로 키웠고 68년부터 80년까지 재단이사장을 맡았으나 실제 학교운영은 실제인 재규씨에게 위임해왔다.
그러나 공인으로서의 고인의 활동은 정계보다는 스포츠분야에서 더큰 발자취를 남겼다.
지난 70년1월 대한사격연맹 회장직을 맡은후부터 체육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듬해엔 아시아사격연맹회장, 76년엔 세계사격연맹부회장으로 피선된데 이어 77년에는 아시아사격연맹 종신명예회장으로 추대될만큼 사격인으로 일관해왔다.
78년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서울에 유치한 그는 이때부터 국제무대에 나서 올림픽유치를 꿈꾸고 있었다. 그의 가장큰 공적은 바로 올림픽유치에 결정적 역할을 한것이다.
81년9월 서독 바덴바덴IOC총회에서 서울올림픽유치가 결정될때 그는 막후에서 중남미등 평소 친분있는 IOC위원들의 지지를 얻는데큰 몫을 했다.
또 82년11월 뉴델리아시안게임중에 열린 아시아경기연맹(GAISF)총회에서는 산유국이라는 커다란 부(부)를 바탕으로 아시아스포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쿠웨이트의「세이크·파히드」를 제치고 2대회장에 피선, 아시아스포츠계에 새 실력자로 등장했다.
이러한 공적으로 84년7월 작고한 김택수씨의 뒤를이어 국내 5번깨 IOC위원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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