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설 덮였던 산에 폭포 흐르고 5만 그루 침엽수 우거져 양봉업 시작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86호 14면

1 그린란드 수도 누크의 상징인 세르미치아크산. 최근 온난화 탓에 산 정상의 만년설이 녹은 물이 폭포를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다.

2 바다의 유니콘이라 불리는 일각고래. 3 그린란드 중부 일리마나크 원주민 마을의 썰매개들. 온난화로 썰매를 끌 일이 줄면서 그린란드의 썰매개는 5년 사이 3분의 1로 줄었다. 최정동 기자

#1 검은 화산암 절벽을 타고 폭포의 거센 물보라가 쏟아진다. 뺨에 와 닿는 물방울의 느낌은 차갑다는 단어로도 부족하다. 털모자를 뒤집어쓰고 장갑을 껴도 금방 오한이 스며든다. 100m가 넘는 검은 절벽을 타고 흘러내린 폭포수의 모태는 만년설(萬年雪)이다. 북극 동토(凍土) 그린란드의 수도 누크의 상징 세르미치아크(Sermitsiaq)산이 녹아내리고 있다.


누크 올드타운에서 바라본 해발 1210m 세르미치아크의 자태는 상징답게 늠름하고 아름답다. 삼각뿔 봉우리는 8000년이 됐다는 만년설을 머리에 얹고 있다. 하지만 뒤돌아선 설산의 모습은 달랐다. 5월 17일 누크항을 떠나 고트호프 피오르 입구에서 만난 세르미치아크산의 뒷모습은 눈이 아닌 폭포였다. 꼭대기 사면은 여전히 두꺼운 만년설에 덮여 있었지만 산허리에서 녹기 시작한 눈은 빙하(氷河)가 아닌 얼음물로 변해 절벽을 타고 모이면서 폭포로 탈바꿈했다. 중국계 가이드 리야는 “날이 따뜻해지면서 지난 10년 사이에 세르미치아크산 만년설이 크게 줄어 들었다”며 “반대로 폭포 크기는 해가 갈수록 커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린란드 남부 나르사수아크의 인공 조림 지역.

#2 그린란드 남부 나르사수아크(Nar ssarssuaq)는 북극 온난화의 또 다른 상징이다. 북극의 일반적 정의는 북위 66도33분 이상의 백야(白夜) 현상이 나타나는 지역을 말한다. 7월과 8월 평균 기온이 섭씨 10도인 등온선(等溫線)의 북쪽, 나무가 자라지 않는 곳을 얘기하기도 한다. 그린란드 남부는 북위 60도까지 내려와 있어 위도로만 보면 북극이라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린란드 전체가 찬 북극해류에 갇혀 있기 때문에 남부 지역도 풀과 관목을 제외한 나무가 자라지 않은 북극권이다.


5월 18일 나르사수아크 공항에 내려 건물을 빠져나오니 뜻밖의 푸른 산이 취재진을 맞았다. 수도 누크의 공항 밖 돌산과는 완연히 다른 풍경이다. 산에는 높이 10m가 넘는 침엽수가 곳곳에 자라고 있다. 산기슭 한쪽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아예 그린란드 수목원(Arboretum Groenlandicum)이라고 써놨다. 1988년 조성을 시작했다는 이곳 실험 수목원에는 현재 15만㎡ 면적의 산지에 시베리아 낙엽송, 북미 로지폴 소나무, 캐나다 가문비나무 등 5만여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최근에는 현지 주민이 꿀벌까지 들여와 그린란드 유일의 양봉업을 시작했다. 그린란드는 보통 6월부터 꽃이 피기 시작해 여름 3개월 동안 꿀을 채취할 수 있다. 현지 안내인 제키 그림슨은 “올해는 지난해보다 여름이 한 달 이상 일찍 찾아와 며칠 전에는 한낮 기온이 영상 17도까지 올랐다”며 “해가 갈수록 나무가 생존·번성할 수 있는 조건이 잘 갖춰지고 있다”고 말했다.


북극이 더워지고 있다. 미국 국립해양대기청(NOAA)에 따르면 2014년 10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북극의 기온은 평년보다 1.5도 높았다. 1900년 이래 최고 기록이다. 20세기 초와 비교하면 3도 이상 높은 온도다. 올해는 온난화가 한층 가속도를 내고 있다. 북극 중에도 대표적인 곳이 그린란드다. 북위 64도에 위치한 그린란드 수도 누크는 지난달 10일 낮 기온이 최고 24도까지 오르는 기록을 남겼다. 같은 날 북위 40도의 미국 뉴욕의 낮 기온은 최고 21도에 그쳤다. 북극 도시의 기온이 중위도 국가 대도시의 기온을 넘어선 것이다.


“올 9월 북극해 얼음 사실상 사라질 수도”지구온난화 현상은 북극권의 얼음을 빠르게 녹이고 있다. 올 3월 북극의 바다 얼음 면적은 1979년 미 항공우주국(NASA)이 위성으로 관측한 이래 역대 최소인 1452만㎢를 기록했다. 이는 평년(1980~2010년 평균)보다 112만㎢나 줄어든 수치다. 한반도(22만㎢)의 5배나 되는 면적의 바다 얼음이 사라진 것이다. 일부 과학자는 올여름이 지나면 10만 년 만에 처음으로 얼음이 없는 북극해가 나타날 추세가 감지되고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피터 와덤스(극지해양물리학) 교수는 미국 국립빙설자료센터(NSIDC)가 제작한 위성자료를 토대로 “올 9월이 되면 북극해의 얼음 면적이 100만㎢도 되지 않아 사실상 사라지게 될 것”이라며 “설사 올해 없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년에는 녹아버릴 전망”이라고 밝혔다.


북극권이 지구 전체 평균보다 온난화 속도가 더 빠른 것은 역설적으로 북극을 뒤덮고 있는 눈과 얼음 때문이다. 북극의 눈부신 만년설은 햇빛의 90%를, 바다 얼음도 절반 정도를 튕겨낸다. 만년설이 그간 지구온난화를 막아주는 역할을 해온 셈이다. 하지만 얼지 않은 바닷물은 햇빛의 90% 이상을 흡수한다. 지구온난화로 북극의 눈과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북극 바다는 예전보다 더 많은 태양 에너지를 흡수한다. 더워진 바다는 북극의 차가운 공기를 데우고 더 많은 수증기를 내뿜는다. 이게 다시 북극을 따뜻하게 만들어 눈과 얼음을 녹인다. 북극이 온난화로 인한 악순환의 고리에 빠진 것이다. 이른바 ‘얼음 반사 피드백’ 현상이다.


『글로벌 북극』의 저자인 극지연구소 김효선 박사는 “최근 기후변화 영향으로 극지방의 눈과 얼음이 녹으면서 지표에 흡수되는 태양에너지 양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며 “산업혁명 이후 전 지구의 평균온도가 약 0.7도 상승한 데 반해 북극은 평균온도가 2.5도 이상 상승해 그 증가폭이 지구 평균의 2배 이상”이라고 말했다.


북극 온난화는 북극의 기후만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다. 북극이 따뜻해질수록 적도와 극지방의 온도 차가 줄어들어 제트기류를 약화시킨다. 이렇게 되면 북극 상공의 찬 기운이 틈을 타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중위도 지역의 기온이 평상시보다 내려가게 된다. 북극의 온도가 올라가고 있는데 한반도의 겨울이 예년보다 더 추워지는 이유다.


“만년설 다 녹으면 해수면 7m 상승”극단적으로 북극의 얼음이 모두 녹는다고 가정하면 지구는 어떻게 될까. 북극 최대의 섬 그린란드의 경우 전체 면적의 81%가 평균 두께 1500m, 최대 3000m에 달하는 거대한 만년설로 덮여 있다. 전 세계 민물의 10%에 해당하는 규모다. 이 만년설이 모두 녹을 경우 지구 전체 해수면을 7m나 상승시킨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남태평양의 섬나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방글라데시와 네덜란드 등 저지대 국가들의 영토 상당 부분이 바다에 잠기게 된다.


환경이 바뀌면 그 속에서 살아온 생명들도 변화를 겪거나 그 와중에 멸종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 북극 온난화가 당장 북극권 경제에 큰 기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북극의 인간·동물·식물에게 환경 변화는 기본적으로 위기다. 북극의 상징, 북극곰이 대표적이다. 그린란드에서는 북쪽 지방을 제외하고는 점점 더 북극곰을 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북극곰의 삶의 터전인 바다 얼음이 빠르게 녹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이 지난해 11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북극곰의 개체 수는 2만2000~3만1000마리 정도다. 하지만 온난화 영향으로 북극곰의 서식지가 점차 줄어들면서 북극곰 개체 수는 향후 35~40년간 30% 이상 감소할 것으로 추산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원주민 이누이트는 개썰매를 몰고 바다 얼음 위를 달리며 사냥·낚시를 해 왔다. 하지만 얼음이 빠르게 녹기 시작하면서 또는 바다가 얼지 않게 되면서 얼음 위에서 하던 전통적인 물개 사냥, 바다 낚시 등을 할 수 없게 됐다. 사냥 방법을 바꾸거나 아니면 전업을 해야 할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일루리사트에서 만난 이누이트 원주민인 유네스코 직원 레너트 프레데릭은 “10대 시절 이곳 바다는 얼음이 2m 두께로 얼었지만 최근 수년간 해수 온도가 많이 올라가 겨울에도 사람이 바다 얼음 위로 올라가지 못할 정도로 얇아졌다”며 “급기야 지난겨울에는 아예 얼음이 얼지 않았을 정도”라고 말했다.


누크·나르사수아크(그린란드)=특별취재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