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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동해도(도오까이도)최후의 여관거리 품천(시나가와)에 닿다.|동해사에 특별지시, 일행안전 보장| 통신사행적 일일이 기록한 일지 절에서 책으로 매어 보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험준한 하꼬네(상량)고개를 무사히 넘어 오다와라(소전원)에서 1박한 신유한공 일행은 다음날 사까와(주구)강을 건너 오오이소(대기)에서 점심을 들고 하오에 사가미(상모·마입)강을 건너 후지사와(등택)의 사관에 들었다.
지금의 사가와강과 사가미강은 폭도 좁고 수량도 많지 않아 강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으나 당시에는 제법 큰물이 흘렀던 모양으로 일본측은 일행의 도강을 위해 각각 90척과 94척의 하천용 배를 연결해서 임시 주교를 가설했다.
일행이 점심을 든 오오이소는 7세기중엽 고구려가 멸망했을 때 일본으로 망명한 유민들이 상륙했던 곳이다. 재일동포작가 김달준씨는 「오오이소」라는 지명자체가 어서 오라는 우리말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만큼 한국과는 인연이 깊은 고장이다.
섬세한 감정을 가진 문필가였던 신공이 그 같은 사실을 알았다면 그 땅을 지나는 감회를 무엇이라고 피력하였을지 궁금하다.
후지사와의 숙사에서는 한밤중에 지진이 일어나 일행을 놀라게 했다.
다음날 일행은 얼마 남지 않은 길을 재촉, 가나가와(신나천)에서 점심을 들고 다마(육향)강을 건너 저녁 무렵에는 드디어 에도(강호)의 입구인 시나가와(품천)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하룻밤만 묵으면 다음날은 이미 에도다.
다마강은 주교대신 배를 타고 건넜다. 황금빛깔과 옻칠이 번쩍이는 호화채선 4척에 국서와 삼사가 나누어 타고 나머지 일행은 주변에서 징발된 배를 탔다.

<주린 백성, 거지가 거리를 가득 메워>
지금의 다마강에는 수많은 다리가 걸려있고 강을 건너면 거기서부터 이미 동경이다. 시나가와는 동경에서도 중심지에 가까운 부도심권의 번화가가 되어있다.
동경역에서 다섯정거장 떨어진 시나가와역을 중심으로 주변에 호텔과 사무실빌딩·쇼핑센터 등이 즐비하다.
그러나 신공이 이곳을 찾은 1719년의 시나가와는 에도에 들어가기 전 하룻밤을 묵게되는 도오까이도(동해도) 최후의 여관거리였다.
신공은 당시 시나가와 주변의 모습을 『해유록』에 이렇게 그리고 있다.
『푸른 소나무가 10리에 뻗치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바닷가에 사는 백성들은 가난한 사람이 많고 부잣집은 적어서 모두 초가집들뿐이다.
발 이랑에는 곡식이 익었는데 주린 백성과 거지아이들이 거리에 가득하고 눈먼 자가 반 이상이나 되니 매우 괴상한 일이다』
통신사 일행을 위한 시나가와의 숙사는 도오까이(동해)사였다. 에도막부 제3대장군 「도꾸가와·이에미쓰」(덕주가광)가 1637년에 창건한 절이다. 5만평의 넓은 경내에 거느리고 있는 말사만 17개를 헤아렸다.
신공은 그중 겐쇼오인(현성원)에 묵었다. 건물이 매우 우람했다고 『해유록』은 전하고 있다.
동경도북품천3정목11번지9호에 있는 도오까이사를 찾았다. 절 입구의 돌기둥에 새겨진「동해선사」란 큼직한 글자가 역사의 현장임을 말해준다.

<신공숙사인 현성원터만 5천여평 남아>
산문을 들어서니 낡은 종각과 본당건물, 정원의 울창한 나무가 오래된 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안정되고 근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혼자 절을 지킨다는 주지 「오오다께」(대악의방·59)씨에게 찾아온 뜻을 얘기하니 조선통신사가 묵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일이 없다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나 신공이 묵었다는 겐쇼오인의 위치를 묻자 지금의 도오까이사가 바로 에도 말기까지 겐쇼오인이 있던 자리라며 친절하게 방으로 안내한다.
「오오다께」씨에 따르면 원래 도오까이사는 지금의 품천소학교, 성남중학교, 인근 주택가와 도로 등을 포함하는 방대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명치초기 품천소학교자리에 있던 본당이 불타 없어지고 경내의 말사들도 명치정부의 배불 정책으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넓었던 부지도 도시계획으로 모두 잘려나가고 정부에 수용 당해 지금은 옛 겐쇼오인터 5천평 정도만이 남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명치이후 본당을 옮기면서 새로 지은 것이어서 신공이 묵었던 겐쇼오인과는 관계가 없다고 한다.
절에 보관돼 내려오는 옛기록이 있으면 통신사에 관한 얘기가 반드시 나올 것이라고 했더니 에도시대에 작성된 입지의 목록을 내다주며 언제 것을 원하느냔다.
유감스럽게도 신공이 이곳에 왔던 17l9년까지의 기록은 없어 1748년, 1764년의 일지를 보여달라고 했다.
『공준기사·부녹산중사고』란 제목이 불은 일지는 여기저기 좀이 먹었으나 한지에 매일 매일 일어난 일을 여러사람의 필적으로 써놓은 것이 책으로 매어져 잘 보관돼 있었다.

<불조심·종치지 말라 휴식위해특별배려>
1748년 통신사(정사 홍계희) 때의 일은 조선삼사가 5월20일 저녁에 도착, 21일 아침 출발했다는 간단한 내용밖에 없었으나 1764년 통신사(정사 조장) 때의 일은 여러 날에 걸쳐 나왔다.
그 내용을 옮겨보자.
『2윌1일. 조선통신사가 올 예정이니 불조심하라는 시달이 있었다.
헌상할 말이 장송원에 도착했다. 중궁·차관·하궁도 사냥매와 함께 도착했다.
2월2일. 헌상할 말이 먼저 떠났다.
2월15일. 통신사일행이 도착한다고 소보청봉항(관직명)과 신견가하수가 사전점검을 하러왔다.
이날 하오 7시경 삼사가 도착하고 하관들은 8시경 도착했다. 장로들은 청광원에 들었다. 7시경부터 비가 왔다.
2월16일 9시경 출발했다. 삼사는 본당 객전에서 묵었다.
3윌11일. 통신사 일행, 귀국 길에 다시 이곳에 머물다. 종치는 것을 삼가라는 지시가 있었다』
불조심하라는 지시나 종을 치지 말라는 지시를 특별히 내린 것은 일행의 안전과 편안한 휴식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배려임은 물론이다.
이 기록으로 보아 통신사가 장군에게 선사할 말과 매 그리고 일부 수행원은 정사 일행보다 보름이나 앞서 이곳에 도착, 선물은 에도로 미리 들여보내고 인원은 여기서 합류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정사·부사·종사관의 삼사는 이곳에서 묵을 때 본당에 모셔져 특별히 정중한 예우를 받았음을 말해준다. 일행이 메도에 머무른 기간은 2월16일부터 3월11일까지 25일간 이였음도 이 기록은 밝혀주고 있다.
처음에 통신사에 관해 들은 일조차 없다던 「오오다께」주지는 하나하나 밝혀지는 사실에 취재팀 못지 않게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동행한 이진희교수가 조선통신사의 왕래를 위해 맺어졌던 에도시대의 선린우호관계와 이들이 일본문화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가를 얘기해주었다.
절을 나서니 차도 건너편으로도 오까이사의 본당 자리에 세위졌다는 품천소학교의 교실과 넓은 운동장이 바라다 보였다.
글 신성순 특파원 사진 김주만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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