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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평범하게, 위대하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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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전수진 기자 중앙일보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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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

영국 남부의 작은 항구도시 헤이스팅스. 인구 8만 명의 소박한 이 도시는 2012년 7월 17일, 지구상 어느 곳보다 활기가 넘쳤다. 런던 여름올림픽 개막을 열흘 앞두고 성화 봉송 행사가 치러지면서다. 런던 올림픽 조직위가 선정한 헤이스팅스 지역 성화 봉송 주자는 17명. 열네 살 소녀부터 일흔 살 할아버지까지, 남녀노소를 아울렀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담당하던 기자도 포함되는 행운을 누렸는데, 순전히 런던 조직위의 선정 기준 덕분이다. “평범한 사람일 것.”

봉송 당일 헤이스팅스 시청 회의실에서 만난 동료 주자들은 학생, 에어로빅 강사, 퇴역 군인 등 과연 평범한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풀어놓은 사연 보따리들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했다 중상을 입고 3개월간 혼수 상태에 빠졌던 마틴 콤슨. 기적적으로 깨어났지만 전신화상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보곤 “차라리 죽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가족의 응원 덕에 이제 참전용사를 위한 봉사자로 거듭난 그는 9개월 된 아들을 안고 말했다. “살아 있어서 행복합니다.” 그의 얘기에 눈물을 흘리던 40대 여성 사라 해턴은 대장암을 극복하고 에어로빅 강사로 활동 중이었다. 응원의 박수를 보내던 14세 소녀 라나 포일은 심장병을 극복한 뒤 육상 선수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런던조직위의 우나 뮤리헤드는 말했다. “성화 봉송은 고군분투하는 보통 사람들의 위대함을 기리는 축제다.”

지난 20일 평창 겨울올림픽 조직위가 성화 봉송 아이디어를 모집한다고 낸 공고를 보고 그날의 헤이스팅스가 떠올랐다. 영국 전역의 8만 마일(1만2875㎞)을 샅샅이 훑은 8000명의 주자들 모두 평범하면서도 특별했다. 그들을 주인공으로 만든 런던 조직위는 최고의 성화 봉송 프로그램을 만들어냈다는 찬사를 받았다. 영리하게도 각자가 봉송한 성화를 199파운드(약 33만6000원)에 판매까지 했으니 수익성을 높이는 데도 혁혁한 공을 세웠을 법하다(적어도 기자를 포함한 헤이스팅스의 17명은 그랬다).

곧 개막하는 리우 여름올림픽도 경기 운영 자체는 산 넘어 산이지만 성화 봉송으로는 흥행몰이 중이다. 최고령 106세 할머니 주자부터 봉송 직후 여자 친구에게 청혼을 한 남성의 얘기까지,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이야기가 넘친다. 곧 유치 5주년을 맞는 평창은 어떤 프로그램을 보여줄 것인가. 흙수저 vs 금수저, 남 vs 여, 남 vs 북 등 갈등 백화점인 한반도에서야말로 올림픽 성화는 꺼져버린 화합의 불씨를 되살려줄 수 있지 않을까.

전 수 진
정치국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