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막화실과 가을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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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내게는 언제나 어린아이같이 소원이 있다. 넓은 공간, 널찍한 화실에서 마음놓고 일해봤으면 하는 것이다.
집앞 상가4층에 화실을 얻고 일해온 지. 십년째. 화실때문에 이사를 못 가 요즘같은 세상에 드물게도 같은 아파트에 십년이상을 살아온 「답답한 친구」가 돼버렸다.
나의 일터인 이 화실은 한해, 두해 작품이 쌓이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창고같이 되어서 올해엔 나를 내쫓는 사태까지 빚고 말았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3년만에 갖기로 한 개인전까지 10월말로 앞당겨짐에 따라 큰방을 구하는 일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 돼버렸다.
널찍한 방을 구하느라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는데도 지쳐『금 나와라 뚝딱』하면 금이 나오듯 눈을 감고 큰 화실을 그리던 어느날 내 머리에서 『뚝딱』하고 요술방망이 소리가 났다. 급하면 통한다든가, 상가 빌딩옥상에 흰 천막을 치자 너무나도 근사한 하얀 화실로 둔갑하는 게 아닌가.
십수년 전 대전에서 타향살이할 때 흙마당에 캔버스를 놓고 하늘을 보며 일하던 때가 떠오르며 이 무상의 화실이 더욱 근사하게 여겨졌다.
캔버스를 천막 안에 들여다놓고 며칠 밤은 행복에 겨워 잠까지 설쳐대며 창문너머로 천막화실을 올려다보곤 했다.『천막이니 작품이 안전하겠느냐』는 막내의 걱정도, 『아라비안 나이트의 요술성』이란 친구의 우스갯소리도, 한여름에 맛보았던 한증막의 열기도 한점 한점 쌓여가는 이 가을의 결실앞에 모두 용해돼 버리는 것 같다.
다만 한가지 바라는 것은 제발 궂은비를 그만 내려주십사하는 것뿐. 비가 내릴 때마다 물바다를 피하느라 받침대 위에 올라앉은 작품을 보며 나는 비로소 근심어린 표정으로 하늘만 쳐다보는 농부의 마음을 알 것 같다.
『하느님, 제발 이 가을엔 밝은 햇살만 쭉쭉 내려줍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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