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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재판부가 보호센터 찾아가 ‘현장 재판’ 할 순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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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중국의 북한 식당에서 일하다 귀순한 탈북인 13명은 21일 서울중앙지법 523호 법정에 오지 않았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이 제기한 ‘인신보호 구제청구’ 첫 심리는 주인공 없이 썰렁하게 진행됐다. 예견된 일이었다.

민변 ‘인신보호 구제청구’ 첫 심리
재판부·민변, 신분 공개 놓고 신경전

서울중앙지법 형사32단독 이영제 판사 주재로 재판이 열리기 30분 전부터 법정 앞 복도는 ‘구국채널’ 등 보수단체 회원 20여 명과 민변 측에 공감한 시민 4~5명으로 채워졌다. 구국채널 박정섭 대표는 “필요 없는 재판이다. 민변이 인민무력부 같은 짓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재판은 시작부터 재판부와 민변의 신경전 양상이었다. 민변 측은 “당사자의 불출석으로 신원 보호의 필요성이 없는 만큼 공개로 하자”고 요청했지만 이 판사는 “내용상 여전히 보호의 필요성이 있다”며 거부했다.

이 작은 법정은 왜 갈등의 현장이 됐을까.

4·13 총선 6일 전인 4월 7일 중국 저장성 닝보시에 있는 류경식당 직원 13명이 집단 귀순하자 정부는 다음 날 즉각 이 사실을 발표했다. 그러자 북측은 연일 “유인 납치극”이라고 비난했다.

그 뒤 민변이 나섰다. 민변 통일위원회(위원장 채희준 변호사)는 국정원에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이하 보호센터)에 수용된 종업원들의 접견을 신청했다가 거부당하자 법원에 인신보호법에 따른 구제 신청서를 냈다. 종업원들이 불법 감금돼 있다는 주장이었다. 채 위원장은 “보호센터에 격리시킨 채 수사하는 건 인권침해다. 탈북 경위 등에 대해 본인들이 말할 기회를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변 주장에도 근거는 있다. 법원에서 간첩 조작 사건으로 결론 난 유우성·홍강철 사건 재판 과정에선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서 이뤄지는 국정원 신문 과정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지난 2월 홍씨의 간첩 혐의에 대한 재판에서 법원은 “사실상의 수사 과정인데도 격리 상태에서 변호인 조력 없이 진행됐다”고 지적했다.

논란을 키운 것은 민변의 방법이다. 국정원이 종업원들에 대한 접견을 불허하자 민변은 북측의 가족을 만나겠다고 통일부에 접촉신청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친북 인사로 알려진 정기열 칭화대 초빙교수가 개입했다.

정 교수는 지난달 18일 평양을 방문해 종업원 가족들로부터 위임장과 가족들의 공민증 및 가족사진 등을 잇따라 민변에 보냈다. 이 서류들을 제출받은 이 판사는 종업원들을 출석시키라고 국정원에 통보했다.

법원의 출석 통지는 민변 측에 우호적인 조치로 해석됐지만 막상 재판의 양상은 달랐다. 재판부는 민변 측에 소송위임장에 대한 보정을 요구했다. “종업원들을 다시 불러달라”는 민변의 요구에 대해선 “추후 판단하겠다”고 답했다. 사실상의 거부로 볼 수 있다.

결국 재판은 두 시간 만에 민변 측이 재판부 기피신청을 하면서 파행으로 끝났다. 채 위원장은 “재판장이 종업원들의 말을 직접 듣겠다는 기존 입장을 바꿨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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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이 주장하는 인권도 중요하고, 국정원이 말하는 탈북자 신변 보호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재판부가 보호센터에 가 당사자들을 만나 진술을 듣고 현장을 살펴보면 어떨까. 요즘 법원은 전남의 섬마을 등에서 ‘현장 재판’을 열며 이를 널리 알리고 있다. 법원은 사회 갈등을 해결하는 기능도 갖고 있다. ‘창조적 문제 해결’을 기대한다.

임장혁 기자·변호사 im.janghy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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