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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한국 정원에 담긴 아름다운 문화 코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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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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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낙
한국현대미술관회 회장

『프랑스 군인 쥐베르가 기록한 병인양요』라는 책을 읽다가 반가운 대목이 눈에 띄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 땅을 밟은 프랑스 해군 장교 앙리 쥐베르(Henri Zuber, 1844~1909)가 강화도 관아(官衙)에 있는 정원을 보고 “영국식으로 가꾸어진 정원”이라는 기록을 남긴 것이다. 

‘옳지, 내 생각에 굵은 밑줄을 쳐 주네’라는 생각이 들면서 독일 유학 시절 자전거를 타고 뮌헨 한복판에 넓게 자리 잡은 공원을 관통하며 등·하교하던 추억이 떠올랐다. 바로 그 공원을 18세기에 영국인 벤저민 톰프슨(1753~1814)경이 조성했다 하여 ‘영국식 공원(Englischer Garten)’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국식 공원’의 상대적 개념으로 ‘프랑스식 정원(Französicher Garten)’이 있다. 아울러 둘은 각기 아주 다른 ‘문화적 냄새’를 풍긴다. 

프랑스식 정원에 심은 나무들은 키가 균등하고 대칭적이며 기하학적으로 배열한 것이 큰 특징이다. 나무의 자연스러운 자태보다는 날카로운 가위질로 직선(直線) 또는 직면(直面)의 조형을 추구한다. 그리고 정원을 방문하는 사람은 지정된 길 외에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는 구조다.  

반면에 영국식 공원은 크고 작은 나무가 혼재한 가운데 사람들이 다니는 길도 주변 환경에 따라 자유롭게 이뤄져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무에 기대거나 나무 그늘에서 한가로이 즐길 수 있게끔 꾸민 것이 특징이다.

여기서 필자가 프랑스식·영국식 공원을 떠올리는 것은 한국과 일본의 정원 양식에 담긴 문화 코드와 신기할 정도로 맥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일본식 정원은 한눈에 봐도 잘 정돈돼 있다. 정원의 나무는 보는 이의 시선에 맞춰 심어져 있고, 나뭇가지는 정원사의 가위질 흔적이 조형미를 더한다. 나무와 더불어 각종 석물(石物)과 깔끔한 흑백 조약돌로 꾸민 정원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관상용’이며 ‘인공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전통 정원은 프랑스식 정원과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 정원에는 프랑스 문화의 코드인 기하학적이면서 대칭적인 조형미가 없다.

과연 한국 정원은 어떠할까? 여러 측면에서 영국 정원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한국 정원은 나무를 ‘가위로 다듬질’하지 않고, 자연미를 살리면서 사람이 정원 안으로 들어가 자연과 함께한다. 이처럼 친자연적 정서가 진하게 스며 있어 프랑스인이 강화도 관아의 정원을 본 뒤 “영국식으로 가꾸어진 정원”이라는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문화 코드가 한국과 일본의 옛 초상화에도 그대로 투영돼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519점의 조선시대 초상화 중 무려 82.7%에서 크고 작은 피부 병변을 확인할 수 있다. 전 세계 초상 미술사에서 유일무이한 예인데, 그 중심에는 화가의 인위성을 철저하게 배격한 조선의 선비정신이 있다.  

반면에 일본 전통 초상화에서는 고승(高僧)의 초상화를 제외하고는 피부 병변을 확인할 수 없다. 일본 정원의 핵심인 이른바 ‘다듬질’을 일본의 초상화에서도 그대로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 정원과 한국 정원이 갖는 문화 코드는 엄연히 다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우리 생활공간에서 일본식 정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개개인이 일본풍 정원을 선호해 그런 것이라면 이는 당연히 논외의 사항이다. 그런데 ‘집주인’이 ‘전지작업’을 한 정원수를 마치 한국식인 것으로 알고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는 그만큼 일본식 정원의 키워드인 ‘가위질’이 우리 눈에 익숙해졌다는 방증이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정원들이다. 수많은 공공 정원들이 온통 일본풍으로 ‘머리 깎기’를 한 나무들로 가득차 있다. 공공 정원마저 마구 가위로 다듬질하는데 가정집 정원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한 나라의 문화는 그 공동체 조직원들의 정신적 뼈대이자 영혼의 양식이라고 한다. 어쩌면 우리네 정원에 담긴 아름다운 문화 코드를 잊은 채 소리 없는 ‘왜침(倭侵)’을 당하고 있는 것도 모르는가 싶어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이 성 낙
한국현대미술관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