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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시 사태’ 재발 막을 과학기술안전법 만들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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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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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진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교수·농학·법학 박사

옥시를 비롯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 사회문제로 막 드러나던 시기, ‘가습기 살균제가 인체에 무해하다’는 광고를 봤다. 살균 기능이 있는 물질로 인해 사람이 호흡할 때 생기는 문제를 쉽게 다룬다는 느낌을 가졌지만 당연히 생물 평가와 같은 과학적 근거를 확인했으리라고 막연히 짐작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2011년 5월 11일 ‘미확인 폐질환으로 산모들이 잇따라 사망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같은 해 8월 31일 질병관리본부가 ‘미확인 폐질환의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라고 발표했다. 수백 명의 국민이 숨진 이유가 가습기 살균제였다는 게 확인되기까지 10여 년이나 걸렸다. 그러고도 5년이 더 지났지만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어 보인다.

수년 전부터 소위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추이를 관심 있게 들여다보며 울분이 치밀었다. 울부짖는 피해자의 목소리는 있어도 가해자나 가습기 살균제 관리 책임자들의 목소리는 아예 없거나 미약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과학기술 관련법이 피해자를 신속하게 구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가습기 살균제 사태’는 우리 사회의 재앙과도 같은 비극인 ‘세월호 사건’보다 오히려 심각한 측면이 있다. 세월호는 사고의 발생 원인과 전개 과정 등이 머릿속에서 비교적 쉽게 그려진다. 가습기 살균제 사태는 오랜 기간 피해자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피해의 원인을 몰랐고, 원인을 파악한 뒤에도 피해를 중지시키거나 피해를 구제하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도 피해 규모와 실체를 제대로 밝히지 못해 국민적 불안과 사회적 파장이 점점 커지고 있다. 정말 무서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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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에서 보듯 과학기술이 초래하는 위험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진다. 첫째, 위험의 원인을 밝히기가 매우 어려울뿐더러 고의나 과실을 판단하기가 매우 난해하다. 둘째, 위험을 장기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했다 하더라도 그 위험이 계속되어 장기화된다. 셋째, 위험 지역이 광역화되고 심지어 국제화될 수 있다.

이러한 위험에 적절히 대처하려면 세 단계의 방어벽이 필요하다. 첫째, 그 위험을 예방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위험을 인지했을 때는 신속하게 그 위험을 제거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론 위험 진압 후 그 위험에 따른 피해를 치유하거나 구제할 수 있는 수단이 제대로 갖춰져 있어야 한다. 법철학 측면에서 보면 과학기술은 편익과 위험을 동시에 가진 양면적 존재다. 적절한 목적과 방법으로 잠재적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게끔 사용돼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과학기술기본법’을 비롯해 수백 개의 과학기술 관련법이 제정되어 있다. 이 중 안전을 목적으로 하는 법만 해도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 등 35개나 된다. 기본법인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법률’ 내에서조차 안전 관련 조항이나 문장을 두고 있다.

최근에는 산업계의 반발을 무릅쓰고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까지 시행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습기 살균제 사태가 명쾌하게 다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수많은 개별법이 과학기술 위험의 특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예방·대응·치유라는 3단계를 제대로 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과학기술을 진흥하는 데만 관심을 둬 왔다. 가습기 살균제 사태는 그 부작용이 얼마나 심각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이제 과학기술의 진흥과 안전을 균형 있게 발전시킬 때가 됐다. 과학기술의 안전성을 높이는 것이 곧 규제라는 오해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안전과 규제는 다르다. 안전성을 높이는 과학기술은 오히려 전체 과학기술을 진흥하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자동차의 브레이크와 조향기술이 발달할수록 자동차가 더 빠르고 안전하게 달릴 수 있다. 가칭 ‘과학기술안전기본법(가칭)’을 서둘러 제정해야 한다.

이 법에 담겨야 하는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과학기술로부터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보호할 국가의 의무에 관한 규정이 담겨야 한다. 둘째, 과학기술 개발부터 활용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에서 사회의 안전을 도모하는 규정이 필요하다. 과학기술 위험의 예방과 위험 발생 시 조치, 피해 구제에 관한 일반적 규정도 반드시 담겨야 한다.

현대사회는 과학기술 사회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과학기술이 제공하는 편익을 외면하고 살 수 없다. 그러나 그 편익은 또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다. 장기간에 걸쳐 끊임없이 확인하고 점검하지 않으면 엄청난 재앙을 부를 수 있다.

꼭 가습기 살균제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공지능이 미래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기술로 자리 잡을 것이란 예측은 이미 오래전에 나왔지만 이를 적절히 규율할 수 있는 법제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무인차량이나 드론, 인공장기 등도 마찬가지다. 미래에 대비하고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과학기술안전기본법이 꼭 필요하다.

조 용 진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교수
농학·법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