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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균실험 중 페니실린 발견, 인류에 ‘항생제’ 선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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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4호 22면

알렉산더 플레밍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 세균학자이다. 푸른곰팡이에 있는 페니실린이라는 물질이 세균을 죽이는 효과를 찾아내 인류에게 ‘항생제’를 선물했다. 인류는 페니실린을 시발점으로 항생제 분야를 개척함으로써 의학을 한 차원 더 발전시켰다. 인류는 이를 계기로 비로소 세균과의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됐다. 페니실린을 비롯한 항생제는 수많은 감염성 질환 환자와 부상자를 구해왔다. 플레밍은 그 공로로 1945년 페니실린의 대량 추출과 정제법을 개발한 옥스퍼드대의 에른스트 보리스 체인, 하워드 월터 플로리와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으로 받았다.


농부의 아들서 세균학자로플레밍은 농부의 아들이었다. 스코틀랜드 에어셔의 다벨에 있는 로흐필드 농장에서 태어났다. 대도시에 나가본 것은 13살 때였다. 런던에 살던 형과 함께 지내며 기술학교에 다니기 위해서였다. 학교를 마치고 상선회사에서 일하던 그는 새로운 길을 걷기 위해 세인트 메리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그는 실험실에서 고독하게 세균을 연구하며 평생 한 우물을 팠다. 이 대학의 세균학·면역학 연구실에서 세균학자로서 일생을 연구로만 일관했다. 과학자가 평생 한 분야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해준 영국의 과학기술 연구 시스템이 플레밍이라는 인물을 만든 것이다.


플레밍은 세균학 연구실에서 세밀한 관찰력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1928년 페니실린과 그 효능을 발견했다. 당시 그는 연구실에서 세균을 배양하고 있었다. 미생물 배양은 뚜껑이 달린 얇고 둥근 유리 접시인 ‘페드리디쉬’를 이용한다. 우선, 고체인 한천을 삶으면 액체가 되는데 여기에 미생물이 양분으로 이용하는 여러 성분을 투입한 뒤 페트리디쉬에 부어 식히면 말랑한 고체 배지가 바닥에 형성된다. 그러면 도구를 이용해 미생물을 배지 표면에 바른 뒤 필요한 온도를 유지해주면 배양이 이뤄진다. 문제는 미생물을 페트리디쉬 표면에 바르는 동안 실험실 공기 등에 있는 다른 미생물에 오염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실험을 할 때는 오염 방지를 위해 미생물을 바르는 도구를 알코올 램프로 소독하고 페트리디쉬 뚜껑은 약간만 열어 작업하는 등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엄격하고 반복적인 과학 실험의 과정이다.


그런데 플레밍은 포도상구균이라는 세균을 배양하던 페트리디쉬 내부가 푸른곰팡이에 오염됐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학명이 ‘페니실린 노타툼(Penicillin Notatum)’이라는 곰팡이였다. 휴가를 다녀온 뒤의 일이었다. 배양 실험 중 실수로 곰팡이 포자에 오염돼 그렇게 자란 것이었다. 실험 실수를 인정하고 모두 폐기 처분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플레밍은 이를 세심하게 관찰했다. 그 결과 포도상구균이 곰팡이 주변에서 전혀 자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곰팡이 곁에선 세균이 아예 녹고 있었다. 푸른곰팡이 주변은 세균이 자라지 못하는 ‘무균 상태’였다. 플레밍은 이 곰팡이가 세균을 죽이는 항균작용을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배양 실패를 바탕으로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다. 푸른곰팡이에서 세균을 죽이는 작용을 하는 물질을 추출해 곰팡이의 학명을 따서 ‘페니실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실패가 관찰력·통찰력에 의해 위대한 과학적 업적으로 발전하는 순간이었다.


페니실린은 세균이 생존에 필수적인 세포벽을 만드는 능력을 차단해 결과적으로 이를 제거한다. 페니실린은 페니실림 노타툼은 물론 ‘페니실룸(푸른곰팡이) 속’에 속하는 다양한 종에서 추출된다. 분자 개량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다. 이 중에서 페니실린G·페니실린 V·암피실린·아목시실린 등이 임상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돼 왔다. 페니실린 속의 푸른곰팡이는 종류가 150종이나 되며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푸른색뿐 아니라 녹색 등과 같은 다양한 색을 띤다. 페니실린 노타툼이나 페니실린 크리소게늄 종이 항생물질인 페니실린을 특히 잘 생산해 의약품 등에 많이 쓰인다.

1 2차대전 중 나온 페니실린 감사 포스터. 페니실린 덕분에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적혀있다

세균 생존 세포벽 차단한 페니실린문제는 페니실린을 추출한 플레밍이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대량으로 추출·정제하는 기술은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인류가 이 기술을 확보해 페니실린을 의약품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무려 9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결국 1938년이 돼서야 플로리와 체인이 이끄는 옥스퍼드대 연구팀이 이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 인류 최초의 항생제 개발은 기초학문의 성과에 대량생산을 위한 응용학문이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질 수 있었다. 과학연구 업적은 분야별 협업이 이뤄진 다음에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사례다. 순수학문과 응용학문의 결합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가르쳐준다.


이로써 인류가 항생물질로 감염성 질병에 대항할 수 있는 신시대가 열렸다. 페니실린은 의학 혁명을 일으켰다. 항생제 혁명이다. 인류를 그토록 괴롭혔던 수많은 질환의 실체가 세균이라는 사실은 이미 19세기 이후 수많은 연구로 밝혀졌다. 하지만 병을 일으키는 세균의 실체는 밝혀졌지만 소독하고 예방하는 것 외에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기껏해야 화학요법제가 등장해 세균에 대항하는 정도였다. 질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인 병원체를 인간의 손으로 통제하는 방법은 당장 찾지 못했다. 플레밍은 바로 그 연결 고리를 찾은 것이다.


페니실린 덕분에 인류는 감염질환과의 전쟁, 이를 유발하는 세균과의 전쟁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게 됐다. 이전까지 인류가 치료할 수 없었던 고질적인 감염질환을 다룰 수 있게 됐다. 폐렴·성홍열·매독·파상풍·괴저 등 당시 흔하게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던 질환을 정복할 수 있게 됐다. 특히 그전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 목숨을 앗아갔던 폐렴이 면역력이 극히 떨어지는 일부 노인이나 중환자를 제외하고는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 됐다. 면역력이 약한 어린이의 목숨을 숱하게 앗아갔던 폐렴을 비롯한 감염성 질환을 항생제로 치료하는 시대가 열리면서 영아 사망률을 크게 줄일 수 있게 됐다. 의학이 항생제를 통해 인구 증가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 셈이다. 초기 페니실린은 소량을 3시간마다 투여하는 원시적인 형태였다. 그 뒤 페니실린 분자를 재디자인해 효능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작용 시간을 늘리는 등 다양한 발전이 이뤄졌다.

2 페니실린은 부상과 감염질환에 시달리던 수많은 장병의 생명을 구하고 전투력과 사기를 높였다.

폐렴 등 감염질환과의 전쟁서 승리페니실린이 특히 위력을 발휘한 곳은 전쟁터였다. 대포나 기관총·소총·총검·칼 등에 의한 부상이 흔한 곳이 전쟁터다. 병사들을 괴롭힌 것은 이러한 무기에 의해 비록 심하지 않은 부상을 입더라도 상처가 덧나면서 상태가 악화돼 전사하는 경우가 잦았다. 인간의 피부는 외부 미생물을 막는 첫째 ‘전선’인데 부상으로 피부가 손상되면 몸 속으로 세균이 침입해 감염될 수 있다. 세균과 독소가 전신으로 퍼지는 패혈증에 빠지면 대부분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보헤미아 출신의 오스트리아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826)는 장미 가시에 찔렸다가 감염성 질환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전쟁터의 군인들이 당하는 부상은 장미 가시로 인한 상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다. 페니실린은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수많은 군인의 목숨을 살렸다.


플레밍이 이룬 역사적인 발견은 페니실린에 그치지 않는다. 항균효소인 리소자임(lysozyme)을 발견해 이를 의약품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전쟁터에서 병사들의 목숨을 앗아간 패혈증에 대한 연구를 전쟁 뒤에도 계속하던 도중 1921년 이를 발견해 학계에 보고했다. 플레밍은 인간의 콧물에 세균이 녹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연구를 거듭한 결과 이는 리소자임이라는 효소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리소자임의 발견은 병원체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완전히 바꿀 정도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병원체가 체내에 들어오면 속수무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리소자임의 발견으로 인체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미생물에 대해 자연 방어체계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리소자임은 동물의 조직·침·눈물, 젖, 알의 흰자 등에 들어있는 항균효소다. 다당류로 이뤄진 점약질을 녹이는 작용을 하는데 일부 세균의 벽이 이런 물질로 이뤄져 있다. 세균성 질환에 대한 치료 작용은 없지만 항생제 작용을 돕는다.


이에 따라 전통적으로 항생제를 사용할 때는 리소자임을 비롯한 항균효소제를 함께 처방한다. 작은 상처에 침을 바르면 세균감염이 억제되거나 중세 때 달걀흰자에 가름을 섞어 상처에 바르는 치료법이 통했던 것은 침이나 달걀 흰자의 리소자임이 작용한 덕분으로 보인다.


플레밍은 사실 참전용사다. 같은 세대의 수많은 젊은이처럼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군의관으로서였다. 프랑스 전선에 있는 야전병원에서 복무하면서 많은 부상병을 보살폈다. 부상으로 인한 감염으로 목숨을 잃어가는 또래 청년을 숱하게 목격했다. 습하고 불결한 참호 속에서 폐렴을 비롯한 각종 감염 질환에 걸린 병사들도 많이 돌봤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고통의 기억을 안고 세인트 메리 병원에 복귀해 세균학과 면역학 연구를 계속했다. 전쟁터에서 목격한 수많은 감염증을 극복할 수 있는 연구를 계속한 것이다. 1차대전에 참전해 살육극을 목격한 플레밍은 결국 부상 군인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과학적인 업적을 쌓았다. 플레밍의 업적은 결국 우연의 선물이라기보다 이런 사명감이 만든 집념의 결과물일 것이다. 우연도 준비된 사람에게만 기회가 된다. 과학에서는 우연에서 중요한 발견을 해서 위대한 업적으로 이어진 경우를 ‘뜻밖의 행운’을 가리키는 ‘세런디피티(serendipity)’라고 한다. 주로 실패를 역으로 이용해 기회로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플레밍이 대표적 경우로 꼽힌다.


플레밍은 자신의 업적에 대해 생전에 많은 보상을 받았다. 1944년 기사 작위 수여를 비롯, 노벨상을 포함한 18개의 각종 상, 25개의 명예박사 학위, 13개의 훈장, 26개의 각종 메달, 87개의 과학협회·학회의 명예회원 위촉으로 세상은 플레밍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플레밍은 아일랜드 출신의 간호사인 새러 멜켈로이와 결혼해 아들 로버트를 뒀지만 1949년 상처했다. 1953년 동료 연구원인 그리스계 의사 아말리아 부레카스와 재혼했다. 하지만 플레밍은 1955년 세상을 떠났다. 아말리아 플레밍은 그리스에 돌아가 민주화 운동을 펼치다 군부독재 정권에 의해 추방됐다가 독재정권이 사라진 뒤 귀국했다. 남편은 세균과, 부인은 군부독재와 치열하게 싸운 의사 부부였다.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chae.inta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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