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가 가능한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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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9월은 정말 바쁘게 지나갔다.
지난달 20일 정기국회가 개회됐지만 남화고향방문단에 이목이 쏠린데다 사석이 겹치고 고대앞사건 등으로 시끄럽다보니 국회가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게 넘어봤다.
사실 정치에 있어 9월 한달은 언뜻 보기에 별 볼일이 없었던 것 같다.
기껏 고대앞 사건이란 것을 두고 여야가 온통 야단법석을 떨어놓고는 또 그걸 수습한다고 거푸 회담을 한것 밖에는 아무것도 한게 없었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9월의 여야 경기는 많은 사람을 실망시킨게 사실이다.
그러나 9월의 그 실망스런 정치과정에서 어떻게 보면 매우 중요한 긍정적인 몇가지 기미랄까, 요소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고대앞 사건을 둘러싸고 여야가 피곤한 입씨름을 벌이는 과정에서 지난 2·l2총선이후 실로 7개월 여만에 처음으로 여야의 뜻이 일치하는 진귀한 (?) 현상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 한가지 사례는 박찬종의원사건으로 여야감정이 악화되던 무렵 신민당이 거당적인 외채절감캠페인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외채에 대한 국민적 경각㈁이 드높고 때마침 정부가외채절감방안을 내놓았던 터여서 외채문제에 관한한 넓은 의미의 여야 공감대가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당시 신민당은 박의원사건의 악화를 원치 않는다는 점에서 분명히 의도적으로 이 캠페인을 발표한 것이지만, 경위야 어떻든 모처럼의 여야일치가 대견스러웠던게 사실이다. 또언제나 명분론에 끌려가는 풍토인 보수야당이 여당과의 정면대림의 와중에서 이렇게 살짝 한걸음 비끼는 정치를 보여준 것도 보기 드문 일이었다.
야당사상 이런 유의 캠페인은 실상 처음이었다.
외채의 공감대는 최근 들어 더욱 발전해 미국 등의 점증하는 무역압력에 여야가 공동대처한다는 합의에까지 이르렀다.
이 합의 역시 박의원사건을 푸는 정치행사의 하나로 마련된 국회의장국무총리 3당대표의 연석회동에서 나온 것이데 선거후 나온 가장 분명한 어조의 여야일치라 해도 좋을 것이다. 김영삼씨가 방미기간중 미국의 대한 시장개방압력을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수 있는 일이다.
최근 예산을 보는 여야의 시각에 있어서도 접근점은 있는것 같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민정 신민당은 다같이 예산의 경기조절기능강화를 강조했다.
정치분야에 있어서도 약간의 기대를 걸수 있을까 싶은 기미가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 야당의 학원특위 구성제의에 들은 체도 않던 민정당이 조건을 달고 꼬리를 붙이긴 했지만 고려해 볼수 있다는 자세를 보이고, 어쩌면 구성이 될것 같은 전망도 낳고 있다.
학원문제의 처방을 놓고「좌경용공의 발본새원」과「민주화만이 해결책」이라는 극단적인 이견을 보이고 있는 여야가 특위의 구성과 활동여하에 따라서는 차츰 현실적 중화과정을 거치면서 넓은 의미의 공감대를 형성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이 비록 진귀하긴 해도 실은 별게 아닌지도 모른다.
여야가 외채문제에서 공감대를 보였더라도 그 구체적 방법론에 들어가서는 현격한 의견차이가 여전한게 사실이고, 방법론의 차이 때문에 큰 테두리의 공감이 무의미해질 수도 있다.
예산의 경기조갈기능강화라는 명제에는 일치했지만 이 일치를 무색케하는 예산공방전이 국회의 심의과정에서 벌어질 것도 거의 뻔하다.
학원특위도 잘하면 구성될지 모르나 구성후의 활동방향과 목적에 관한 의견차이로 구성하나마나 하는 상태가 될 가능성도 있다.
오히려 이런 몇가지의 여야의견접근이 국면을 보다 유리하게 이끌려는 피치의 전술적 방법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7개월여의 정치과정에서 비로소 나타나는 이런 사소하다면 사소한 여야 공감대를 귀중히 여기고 싶은 심정이다.
목적과 이해관계가 다른 집단이 정치과정에시 티격태격하고 더러 고성도 내는 것은 항다반사라 할수 있지만 지난 7개월간의 정국을 보면「우리정치가 과연 합의가 가능한 정치인가」라는 의구심을 품게 한것이 사실이었다.
총선후의 사면·복귄을 둘러싼 등원협상, 학원안정법 파동 등에서도 그런 걱정이 있었고 이번 고대앞 사건을 보아도 그런 적정은 마찬가지였다.
정작 개헌문제라는 본격전에 들어서기도 전에 정국이 이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될것인가 하는 우려가 짙게 나오는 것이 전혀 이상할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7개월을 겪다보니 의미가 그든 작든 여야간 합의의 사레를 보는 것이 그만큼 더 반감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제 정치에 있어서는 별볼일 없게 느껴지던 9월이 가고 10월이 왔다. 여야가 경계하고 버르고해 마지않던 이른바「가을정국」의 본무대가 열리려 한다. 개헌문제가 차츰 정국의 핵심쟁점이 될것이다.
이런 가을정국을 맞아 여야는 작은 일치라도 소중히 여겨 그 축적을 바탕으로 큰 일치를 이끌어내는 정치를 보여야할 것이다.「끝내 합의를 못보는 정치」는 정치일수 없다.
얼마전 남북대화에 관한 신문좌담회에 나온 한 대학교수는 국력 체제등 어느면에서나 우리측이 북한을 압도하고 있지만 북한측이 유일하게 희망을 거는 구석이 바로 우리 국내정치라고 설파했다.
국내정치가 합의를 볼수 없는 정치로 간다면 그게 북한의 찬스가 될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남북대결 해외무역여건 경제문제등 국내사정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여야가 소리보다는 대동을 중시하는「가을정국」을 이제부터 보여주기를 대망한다. 송진혁<본사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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