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6)제83화 장경근 일기 본사 독점게재(2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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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60년11월30일
어제 김기철사장이 도쿄에서 비행기편으로 이곳에 왔다. 그는 우리들의 신원확인서를 써서 「다나까」 경부에게 주고 따로 일화 7만엔도 내게 전해왔다. 그는 나를 만날 계획이었으나 기자들의 추적을 피하기가 어렵게 되어 단념하고 오늘아침 비행기로 돌아갔다. 어려운때의 참된 우정이 가슴을 뜨겁게 한다.
김사장이 내게 못온것은 어제 저녁 끝내 한기자가 내가 있는곳이 나가따 법원임을 알아내 찾아왔기 때문이다. 원장 「나가따」박사가 현관까지 나가 그런사람이 입원한 일이 없다고 완강히 버티자 기자는 믿지않으면서도 밤이 늦은 시간이어서 무리한 청을 못하고 돌아갔다. 그렇지만 아침이 되면 필시 여러명의 기자가 몰려올것이 뻔하고 그때는 더이상 숨길수가 없기 때문에 심야에 피난처를 옮기기로 했다.
경찰 당국은 새벽4시 나가따 법원의 승용차에 우리를 태워 후꾸오까 시내의 오오모리(대삼)제작소 사원 숙소로 옮기게 했다. 오전에 「히라이」(평정수일) 외사과장이 「다나까」경부와 함께 나를 찾아와 후꾸오까 검찰청이 우리 셋을 출입국관리령 위반으로 기소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나와 만순은 불구속기소로 결정되어 오늘밤 도쿄로 떠날수 있으나 비서 이병균군은 구속 기소키로 검찰 방침이 결정되어 오늘구속을 집행하겠다고 한다. 우리셋은 이곳까지 한 목숨으로 서로 의지하고 고생을 함께 해왔는데 작별해야 한다니 슬픈 일이다. 만순은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서러워하지만 어쩔수없다. 나는 옆방의 이군을 불러 이 사실을 전하고 내가 도쿄에 가는 대로 이군이 형무소에서 석방되어 우리와 함께 지낼수 있도록 백방으로 힘쓰겠다는 위로를 하고 슬픈작별을 했다.
나와 만순이 도쿄로 가기 위해 자동차로 이따즈께(판부) 공항에 도착한것이 새벽 1시 좀 전이다. 그동안 나는 줄곧 외부와 밀폐되어 있었으나 이번 도쿄행은 새어나가 온 신문들이 새벽 1시40분발 도쿄행JAL기편으르 내가 도쿄로 떠난다고 보도했다. 더 이상 침묵하고 지낼 수만도 없는 일이어서 공항기자회견은 승낙했다. 자동차에서 내리자 카메라 플래시 세례다.
조총련의 극성스런 위협 때문에 일본 당국은 내 신변을 염려해 경찰관 60여명으로 공항 안팎을 경계했다. 어제 저녁 잠을 못 잔데다 이군의 구속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인지 오늘은 갈증과 피로가 한층 더하다. 공항 소퍼에 누워 정찰이 데려온 의사의 진료를 받고 다소 안정한 후 기자회견을 위해 마련해둔 방으로 부축을 받아 걸어갔다.
망명경위등에 대한 질문에 이어 어느기자가 내가 반일정책 추진자였으며 한일회담에서 대일 강경론자였다는데 지금 심경은 어떠냐고 해 한일회담의 한국대표로서 한국의 이익을 대표하는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했다. 일본에 영주할 의향이냐고 했을때는 본국의 정정이 안정되어 신변의 위험이 줄어들면 귀국할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예정시간보다 늦어 2시에 이륙했다. 기류가 나빠 비행기의 요동이 심해 줄곧 누워 있었다. 동행하는 「다나까」경부가 공항에서 만난 마이니찌 신문의 후꾸오까 총국 기자의 전언이라며 후꾸오까의 「나가사끼」(장기우삼) 변호사와 오구라의 「야마모또」(산본광현)변호사가 나의 변론을 맡겠다더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두 분은 8·15해방 전 서울에서 나와 함께 사법관을 지냈다. 그 동안 한일회담 대표로 일본에 내왕할 때도 서로 소식을 통한 일이 없어 사는곳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내가 고생하고 있는 사정을 신문을 통해 읽고 알게 되었으나 거처가 비밀이어서 나를 만나지 못하고 기자에게 부탁해 내게 말을 전한다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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